송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공조참판, 호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인보(仁寶)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95년(연산군 1)
본관
여산(礪山)
주요 관직
사헌부장령|우승지|공조참판|호조참판|예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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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공조참판, 호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인보(仁寶). 송계성(宋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복원(宋復元)이고, 아버지는 송정수(宋玎壽)이다. 어머니는 박인영(朴仁榮)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69년(예종 1) 왕의 은총을 입어 허통(許通)으로 벼슬길에 나서 감찰이 되자 여러 대신들이 제수된 관직에 대해 개정을 요구하였다.

즉, 작은아버지 송현수(宋玹壽)의 역모죄(임사홍과 함께 죄를 저지른 것)에 따라 연좌율(緣坐律: 죄를 저지른 자의 일정한 친족 범위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적용시키는 죄형)을 적용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그 뒤 148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으나, 지난날 난신(亂臣: 난을 일으킨 현수를 이름)의 자제로 대간직은 맞지 않는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또다시 받았다.

그러나 왕은 대간들의 요구에 구애받지 않고 1482년에 다시 송영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하였다. 이에 또다시 대간의 탄핵이 있자 선비로서 떳떳함을 주장하면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듬해 장령이 되고, 1484년에는 추생어사(抽栍御史)가 되어 오포(烏浦)로 나가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였다. 이어 이듬해 부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에도 작은아버지 송현수의 역모죄 때문에 관직에 제수될 때마다 연좌율이 거론되었으나 인물됨이 왕에게 인정을 받아 무사히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486년에는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좌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듬해 좌승지에 재직 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주(辛柱)가 지방에 있으면서 그곳 백성들과 수령들에게까지 횡포를 자행하자 송영을 서울로 불러들여 횡포를 막게 하자는 청을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 해 도승지가 되었으며, 1488년(성종 19)에 평안도의 의주별선위사(義州別宣慰使)로 파견된 뒤, 왕에게 복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즉, 북관(北關)은 우리 나라의 관문으로 그 중요성이 큰 데 비해 이곳에서 운영되는 행정 체제·국방 문제 등은 매우 허술하여 여러 가지 폐단이 노정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대안으로 유능하고 책임있는 관료의 파견, 큰 지역에 비해 태부족인 노비의 보충, 그리고 역로(驛路)를 운영하는 관군(館軍)의 윤번(輪番: 차례를 정하여 교대로 근무함)의 기한을 정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1489년 공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이 되어서는 지켜지지 않은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의 승륙법(陞六法: 관리들의 관직 승급을 연공 서열로 하지 않고 특별히 6품으로 바로 임명하던 제도)이 만연되어 지위와 녹을 축내는 용관(冗官: 실무에 필요없는 관리)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게 검직(檢職) 또는 군직(軍職)을 주어 퇴거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동지중추부사·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에는 경기도관찰사로 나가 감사의 직임에 충실하였다. 1491년에 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영안도순찰사(永安道巡察使)가 되었으며, 1494년에 예조참판으로 좌빈객(左賓客)을 겸하였다.

송영은 성종대에 능력있는 관료로서 일관되게 정도를 걸었기 때문에 초창기 대간들이 주장한 연좌율에도 희생되지 않고 비교적 평탄한 벼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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