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삼베 바탕에 채색. 세로 9.6m, 가로 4.82m. 상화원(上畵員) 인문(印文), 부화원(副畵員) 초경(草敬), 그리고 응옥(應玉), 경연(敬衍), 혜명(惠明)이 1704년(숙종 30)에 제작하였다. 1822년에 화사(畵師) 석연(昔演) 외 3인이 보수했다. 화면 상단에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의 주존명(主尊銘)과 화기(畵記)에 ‘세존괘불영상(世尊掛佛影像)’의 명칭이 있다.
화면 한가운데 노사나불입상이 장대하게 표현된 단독상인데, 연꽃 가지를 들었으며 7구의 화불(化佛)이 표현된 보관(寶冠)을 썼다. 원형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으며 두광 주변에는 화염문으로 표현하였다. 노사나불의 얼굴은 방형이며 눈은 양 끝이 치켜 올라갔고, 눈동자는 작게 표현되었다.
굵은 목 아래 삼도(三道)의 표현, 왼쪽보다 넓은 오른쪽 어깨, 커다란 손 등이 어색하지만 신체의 비례는 적절한 편이다. 등·어깨·머리 위로 퍼져있는 오색 광선과 신광의 하늘색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주황색 천의(天衣: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는 주존불인 노사나불을 강조하고 있다. 두 어깨를 덮은 천의는 큼직한 편으로 묵직하며, 치마 자락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처리는 도식화되었다. 가슴 위로 치켜 입은 내의(內衣)의 국화문은 금니(金泥)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다. 전체적으로 문양은 적게 표현되었는데, 오색 광선문 외에 광배와 배경은 여백으로 남겨두어 본존불을 강조하였다.
육중한 보관, 천의, 목걸이, 장신구가 달린 매듭 끈과 무릎 장식 등에서 문양과 장식이 억제된 것을 알 수 있다. 주홍색과 녹색이 주조색이며 하늘색과 분홍색이 돋보인다. 가볍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상이 노사나불의 흰 피부와 어울려 밝고 화사하다.
화면의 상단에는 향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범자 '옴'을 시작으로 원 안에 한 글자씩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을 적어 존명을 나타내었다. 하단에는 별도의 화기란을 구획하지 않고 화면 바깥 변 부분에 화기를 기록하였다. 화기에는 1704년 괘불도 조성 시기와 이후 1822년 중수한 시기에 참여했던 시주자들과 당시의 소임자들, 화원(작가) 등이 나열되어 있다.
흔히 보관불로 등장하는 노사나불은 두 손을 어깨 위치에 둔 설법인의 손 모양이지만 연꽃을 든 경우도 있다. 석가불의 일대기인 팔상도의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에서 노사나불로 출현한 석가불을 발견할 수 있다. 녹원전법상은 성도(成道)를 이룬 석가불이 노사나불로 화(化)하여 화엄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천은사'명 팔상도(1715년, 소재 불명)의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가운데 석가불이 연꽃을 든 노사나불좌상으로 화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경북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도(1755년) 중 노사나불좌상도 연꽃을 들었다. 따라서 17세기의 군도식 노사나불 괘불도의 노사나불이 설법인을 한 전형적인 도상과는 달리 18세기에 독존 형식이 대두되면서 연꽃을 든 노사나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연꽃을 든 보관불은 화신 석가모니불, 미륵불로도 표현되기 때문에 존명(尊名)이 없다면 이들의 구별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