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제 ()

의성 신지제 생가 및 비
의성 신지제 생가 및 비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성균관직강, 창원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순보(順夫)
오봉(梧峰), 오재(梧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2년(명종 17)
사망 연도
1624년(인조 2)
본관
아주(鵝洲: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
출생지
의성
주요 관직
성균관직강|창원부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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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성균관직강, 창원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증창례원판결사 신한(申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신응규(申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신몽득(申夢得)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박민수(朴敏樹)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 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신지제의 시문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학사집(鶴沙集)』
『의성현지(義城縣誌)』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조선총독부편,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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