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학궁 ()

고대사
유적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성 유적.
유적
건립 시기
고구려시대
관련 국가
고구려
둘레
2.488㎞
소재지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내용 요약

안학궁은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성 유적이다. 대성산 남쪽에 자리하는 전체 둘레 약 2.5㎞의 마름모꼴 평지성이다. 일반 거주구역 등을 포함하지 않은 왕궁 유적으로,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6세기 이전설, 6세기 초반설, 6세기 후반설, 고구려 후기설, 고려시대설 등의 이견이 있다.

정의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성 유적.
형태와 특징

안학궁(安鶴宮)은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인 대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다. 한 변 622m, 전체 둘레 2.488㎞의 마름모꼴 주1이다. 성벽 바닥 부분의 너비는 8.2~10m이고, 성벽의 남은 높이는 약 6m이다. 성문은 남벽에 3개, 그 외 성벽마다 1개씩 설치되었고, 네 모서리에는 주2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 내부에는 동궁, 서궁, 남궁, 북궁, 중궁 등 5개의 건축군(建築群)이 분포하며, 51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그 외 정원과 연못,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일반 거주구역과 관청구역을 포함하지 않는 전형적인 왕궁이나 궁성으로 해석된다.

의의 및 평가

일찍이 안학궁을 고구려 전기 평양성의 평지성으로 이해하면서 그 조성 시기를 3세기 혹은 평양 천도(427년) 당시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427년부터 고구려가 장안성(후기 평양성)으로 천도하는 567년까지 안학궁이 고구려의 평지 도성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안학궁에서 채집 · 출토된 대부분의 기와 및 주3을 고구려 시기의 것으로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안학궁 유적 밑에서 5~6세기의 고구려 주4이 확인되었고, 특히 안학궁이 이 돌방무덤들을 파괴하며 조성된 흔적이 확인됨에 따라 안학궁의 조성 시기는 6세기 이후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개와(改瓦) 가능성 여부와 돌방무덤 출토 토기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안학궁을 문자왕(文咨王, ?~519) 대에 새롭게 조성된 왕궁 혹은 평원왕(平原王, ?~590) 대에 조성된 별궁으로 보기도 하고, 고구려시대가 아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한편, 안학궁의 건물 배치 양상이 수당(隋唐) 대에 폐기된 북위(北魏) 방식 태극전과 동서당 제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서 그 조성 시기를 6세기 이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정배, 남일룡 외, 『고구려 안학궁 조사 보고서 2006』(동북아역사재단, 2006)

논문

양시은, 「고구려 도성제 재고」(『한국상고사학보』 112, 2021)
권순홍, 「고구려 ‘평양’의 변천과 전기 평양성의 위치에 관한 쟁점 검토」(『역사문화연구』 70, 2019)
奇庚良, 「高句麗 王都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여호규, 「고구려 도성의 구조와 경관의 변화」(『삼국시대 고고학개론 1』, 진인진, 2014)
박순발, 「高句麗의 都城과 墓域」(『韓國古代史探究』 12, 2012)
梁正錫, 「高句麗 安鶴宮 中央 建築群에 대한 考察」(『中國史硏究』 56, 2008)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韓國史硏究』 137, 2007)
閔德植, 「高句麗 平壤城의 都市形態와 設計」(『高句麗硏究』 15, 2003)
주석
주1

평지에 둘러쌓은 성. 고구려의 요동성,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주2

성벽 위의 모서리에 지은 누각.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것으로,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쓰였다.    우리말샘

주3

기와의 마구리. 막새나 내림새의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으로, 원형이나 혓바닥 같은 반원형 또는 좁고 굽은 긴 전이 붙어 있으며 무늬가 있다.    우리말샘

주4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 널길이 달려 있고 천장 구조가 다양하다.    우리말샘

집필자
권순홍(경희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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