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1781년(정조 5)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曺學臣)이 젊은시절 지금의 터에 살림집을 건축하고 주위에 송림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앞쪽의 길을 향하여 나앉은 광명헌(光明軒)과 후방에 배치된 별묘(別廟) 및 보본재(報本齋)는 후대에 추가로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광명헌은 현 소유자 조익현(曺翊鉉)의 증조부가 중수하였다. 사랑채는 독립군에 군자금 헌납사건으로 일제관헌에 의하여 재해를 당한 것을 소유자의 할아버지가 1915년에 중수하였다.
이 집은 야산의 송림이 낮게 둘러싼 평지마을의 중심부에 넓게 자리잡고 있다. 길 쪽의 새사랑채와 행랑채의 솟을대문 지붕 사이로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마루가 조금씩 보이는 평면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행랑채와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배치된 사랑채는 안채와 {{#051}}형으로 튼□자를 이루었다.
오른편에 사당이 배설되었고 그 후방에 체천위(遞遷位)를 모신 별묘와 보본재 등이 자리잡고 있어서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안채는 ㄇ형으로 남향하였으며, 그 중앙부 4칸 중 오른쪽 2칸은 툇마루의 뒤쪽에 안방을 통칸으로 구성하였다.
중앙부 4칸의 양끝에서는 마당을 에워싸듯이 동향 · 서향한 양익(兩翼)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대칭을 이루었다. 안방 쪽에는 부엌 3칸과 고방 2칸을 설치하였고, 대청 쪽에는 모서리에 작은방 1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아랫방과 마루방 등을 같은 규모인 5칸 크기로 배설하였다.
‘만취당(晩翠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사랑채는 정면 5칸인데 그 중 왼쪽 2칸은 사랑방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꾸몄으며, 오른쪽 2칸에는 앞이 트인 대청을 드렸다. 그리고 오른쪽 끝 1칸은 앞뒷면에 툇마루를 시설한 재방(齋房)으로 꾸몄다.
재방의 뒷벽에는 두짝여닫이 살문을 달아 뒤쪽의 사당과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왼쪽으로는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간 및 2칸의 중사랑방과 마루 1칸이 一자로 배열된 중사랑채가 있다.
안채의 구조는 잡석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방형(方形)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대청상부는 3량가(三樑架)로 구름 위에 달이 떠 있는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판대공을 세워서 마루도리와 장여를 받고 있다. 사랑채는 마루 주위에는 두리기둥을, 방에는 네모기둥을 세웠고 대청의 상부 가구(架構)는 5량가로 초각(草刻)한 판대공을 사용하였다.
이 집은 조선시대 후기의 주택으로 방앗간채는 철거되었으나 정침(正寢: 안채)을 비롯하여 사랑채 · 새사랑채 · 별묘재사(別廟齋舍: 報本齋) · 체천위별묘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주택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서 당시의 건축양식과 주생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