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겸 ()

추탄선생집
추탄선생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첨지중추부사, 대사헌,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익(汝益)
추탄(楸灘), 토당(土塘)
시호
충간(忠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9년(명종 14)
사망 연도
1636년(인조 14)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영릉참봉|종사관|안주목사|좌부승지|첨지중추부사|대사헌|좌의정
관련 사건
인조반정|이괄의 난
정의
조선 후기에, 첨지중추부사, 대사헌,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오옥정(吳玉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오경민(吳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이다.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했다가 부수찬(副修撰)·이조좌랑·지제교(知製敎)·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해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해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하고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柎廟: 상을 마친 뒤 神主를 太廟에 모심.)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해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 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요컨대,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禰廟: 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 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정치를 잘한 수령(守令)으로 명성을 얻었다.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溫雅端粹)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經濟)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李貴)·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인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1663년(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해 『동사일록(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추탄문집(楸灘文集)』
『청음집(淸陰集)』(김상헌)
『쇄미록(瑣尾錄)』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정만조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