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신촌리에서 진안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있는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이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침입한 왜병은 40여 일만에 한성 · 평양 · 개성을 함락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 때 해로에는 이순신장군이 방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로를 통하여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별장인 야스구니지(安國寺惠瓊)는 창녕(昌寧)에 있다가 남원으로 들어간 다음 전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부대의 공격으로 진로가 막혀 성주(星州)로 올라왔다.
뒤에 적군은 용담(龍潭) · 진안(鎭安)을 공격하여 웅치를 넘고, 별군 1,000명은 진산(珍山)에 진을 치고 이치(梨峙)를 넘어서 전주로 들어오려 하였다. 이 때 김제군수 정담(鄭湛)은 전주진관병마첨절사(全州鎭管兵馬僉節使)로서 동복현감 황진과 더불어 지세와 적정을 살피는 한편, 목책으로 진지를 구축하였다. 제1선에는 의병장 황박, 제2선에는 나주판관 이복남(李福南), 제3선에는 정담이 진을 치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7월 7일 적 수천 명의 선봉대가 조총을 쏘며 공격해왔으나 황박과 이복남은 많은 적을 사살한 끝에 이를 격퇴하고 진지를 강화하였다. 이튿날 새벽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전면공격을 감행해오자 끝까지 분전하였으나 결국 화살이 떨어져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정담 · 강운(姜運) · 박형길(朴亨吉)이 전사하고,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은 중상을 입었다. 왜군 또한 이 싸움에서 큰 피해를 보아 끝내 공략을 포기하고 말았다.
웅치싸움이 끝난 후 왜군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에 깊이 탄복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순사(殉死)한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吊朝鮮國忠肝義膽(조조선국충간의담)’이라는 표목을 세워 조선의 충신과 의사(義士)의 영혼을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