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태승(泰升), 호는 하곡(霞谷).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휘(尹暉)이다. 아버지는 첨정 윤면지(尹勉之)이며, 어머니는 참판 경섬(慶暹)의 딸이다.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그 뒤 국왕의 알성(謁聖) 뒤에 치러진 제술 시험에서 합격하였으나, 4등한 김석주(金錫胄)를 합격시키려다가 말썽이 생겨, 장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방시켜 윤계도 떨어졌다.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665년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했으며, 1669년 직강으로서 황해도도사를 겸했다가 직무 수행의 잘못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사서에 제수된 뒤 세자시강원문학·지평(持平)을 지냈고, 1671년 정언(正言)이 되어 재상의 권한 비대로 야기된 시폐(時弊)를 논했으며, 장령·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중국 사신에게 선왕 효종이 신하의 견제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한 원접사(遠接使) 오시수(吳始壽)를 극론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된 뒤 영광에 유배되었다. 1680년 동부승지에 서용되었으며, 함경감사를 거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강화유수를 차례로 지냈다.
1686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강화유수 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었다는 탄핵을 받아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이 되고 좌참찬·공조판서를 거쳐 비변사(備邊司)의 천거로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송시열(宋時烈) 당(黨)으로 몰려 강진에 귀양갔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나라 일에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1694년 신원(伸寃)되었다. 저서로는 『하곡집』이 있다. 시호는 익정(翼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