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간,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성(汝省)
미강(眉江), 송음(松陰)
시호
효정(孝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5년(선조 28)
사망 연도
1648년(인조 26)
본관
덕수(德水)
주요 관직
예조좌랑|정언|지평|홍문관수찬|형조정랑|청주목사|도승지|대사간|이조판서|지중추부사
관련 사건
정묘호란|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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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성(汝省), 호는 미강(眉江) 또는 송음(松陰). 이함(李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인상(李麟祥)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통(李通)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유전(柳㙉)의 딸이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후 참봉으로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처음 전적에 임명되어 정언,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1626년(인조 4)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당시 계운궁 우제(啓運宮虞祭) 때 부원군 이귀(李貴)와의 의견 차이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전적(典籍)·정언(正言)·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왕이 강화로 피란가자 어사로서 호남에 내려가 식량 조달에 공을 크게 세웠다. 그 뒤 5, 6년 간은 양사의 지평(持平)·헌납(獻納)·사간을, 세자시강원에서 사서·보덕 등을, 홍문관에서는 수찬(修撰)·응교(應敎) 등을 여러 차례 거쳤다.

교리 때에는 경천(敬天)·휼민(恤民)·납간(納諫)·용인(用人)·숭검(崇儉)·돈종(敦宗)·진학(進學)·형내(刑內) 등 8조를 올려, 광해군 때의 해로운 풍습의 잔해를 쇄신하도록 주장해 왕이 가납(嘉納)하였다. 이어서 검상을 거쳐 사인·형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청주목사·응교·첨지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병방승지로 호종해 공을 세워 환도 이후 도승지로 승격하였다. 곧이어 병조판서 겸 비변사유사 및 군공청당상(軍功廳堂上)을 맡아 전국 장사(將士)들의 공죄(功罪)를 잘 조사한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1638년에는 왜인들이 호란을 빙자해 침입할 기세를 보이므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가 되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나갔으나, 병으로 물러났다가 16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 때에는 홍무적(洪茂績)·유백증(兪伯曾) 등의 질시와 배척을 받았으나 왕과 다른 대간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왜인들의 간교함과 민막(民瘼)의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이듬해 조민(趙珉)이라는 인물을 잘못 기용한 일로 유배되었다.

1646년 지중추부사로 시관이 되어 국왕의 휘(諱)에 저촉되게 잘못 제출해, 이식(李植)과 함께 삭출(削黜)되어 강교(江郊)에 은거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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