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사(汝思), 호는 지전(芝田). 이함(李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인상(李麟祥)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통(李通)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유전(柳㙉)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18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었고, 봉상시주부를 거쳐 강원도도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대북파의 득세로 관계에 진출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 대각(臺閣)에 들어가 장령·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의 정랑, 전적·직강·사예원첨정·사복시첨정·장악원정·필선·시강 등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했으며 그 뒤 병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를 지내고,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어 공주목사로 나갔다가 전 목사 송흥주(宋興周)의 무고로 정직당하였다. 1630년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島)에 나가 일을 잘 처리했고, 돌아와 형조참의·승지·호조참의를 지냈다.
1633년 삼사의 판관들이 인조 아버지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할 때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이들을 옹호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서 3년 동안 유배되었다.
1636년 한재가 있자 대사헌 조익(趙翼)이 사면을 청해 승정원 신하들과 함께 풀려 나와 형조참의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환도 후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화의 때의 공로로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1639년 서추 겸 동지의금부사(西樞兼同知義禁府事)가 되고, 사은사의 부사로 심양(瀋陽)에 가서 볼모로 있는 세자를 원손과 대치하려고 노력한 것이 왕의 뜻을 어겼다 하여 남양(南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귀국하자 죄가 풀려 공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1642년에 경기감사로 나가 진휼을 잘했으며, 이어 도승지·서반 겸 사옹원제조(西班兼司饔院提調)를 지냈다. 1644년 원접사(遠接使)로 다녀온 뒤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647년 동지의금부사로 호조참판을 겸했고, 이듬해 공조·예조의 참판,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1651년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 옥책을 써 올려 상을 받았다. 이어서 병조와 의금부 등에 봉직하다가 그 해에 죽었다. 착실하고 능력있는 관료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서, 궁중의 옥책문(玉冊文)을 많이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