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지비자(知非子).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이후영(李後英)이다.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호조참판 조문수(曺文秀)의 딸이다.
1677년(숙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2년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부정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의정부사록·의금부도사·성균관전적·공조좌랑·병조좌랑 등을 거쳐 1684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685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는데, 이 때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다가 순안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병조정랑을 거쳐 다시 정언·지평이 되어, 국정 전반에 걸친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병조정랑·사복시정을 거쳐 16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동래상인들의 잠매행위(潛賣行爲: 밀매행위)와 왜인의 불법을 징치하는 데에 크게 힘썼다.
기사환국 때에 일시 사직하여 향리에 돌아갔다가, 해주목사·병조참지·의주부윤·장례원판결사·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9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동부승지·예조참의가 되었다. 169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사서(史書)를 구입하다 금령에 걸려 파직되었다.
다시 형조참의·무주부사·강원감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1704년 충청감사가 되었으나, 재직 중에 병으로 죽었다. 특히 글씨에 능하여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