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성(師聲), 호는 근재(覲齋). 아버지는 호조참판 이개지(李介智)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하경리(河敬履)의 딸이다.
1456년(세조 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0년에는 춘당시(春塘試)에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주부를 거쳐, 1464년에는 수찬낭관(修撰郎官)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맹현은 1475년(성종 6) 경회루를 중수하자는 논의가 있자, 백성들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공사(公私)의 영선(營繕)은 일절 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어 여러 읍의 전적(田籍)을 살펴보고 전안(田案)에 모람(冒濫)과 결수(結數)의 착오가 많음을 지적하여 그 시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저술로는 유시(遺詩) 4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