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이보(易甫). 이윤악(李胤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운(李世雲)이다. 아버지는 이의하(李宜夏)이며, 어머니는 김석창(金錫昌)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조가 왕세손으로서 대향(大享: 조선시대 종묘 등에서 정기적으로 지내는 큰 제사)을 지낼 때 예모관(禮貌官)이 되어 가자(加資)되고, 1776년(영조 52)에 승지로서 궁실의 의복과 사치를 경계하여 절검하는 본보기를 국왕이 몸소 보여야 한다고 직언하였다.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가서는 양전(量田) 후 진전(陳田: 경작하지 않은 토지)으로 된 땅은 기전(起田)하는대로 수세하도록 하고, 또한 전주부의 성첩(城堞)을 개축하면서 1만 포의 수성곡(守城穀)을 마련하는 등 관치(官治) 행정에 주력하였다.
1778년(정조 2)에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을 합치는 것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가 있자, 행부사직(行副司直)인 이보행은 쓸모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쓸모없는 군량을 제거하는 것이 융정(戎政)을 바로 잡는 것이라 하여 양청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또 강화에 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하는 해방(海防)에 대한 논의, 양전의 폐단에 대한 시행법 논의 등의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대사성·대사간·동지경연·이조참판·선혜청제조를 거쳐 1779년(정조 3)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홍낙순(洪樂純)·홍계능(洪啓能)과 관련된 서명응(徐命應)의 치죄(治罪)를 강력히 주장하다가 도리어 추자도(楸子島)에 정배되어 거기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