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모은(慕隱)이다.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충혜배향공신(忠惠配享功臣)·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의 손자이며,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이포(李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설문우(薛文遇)의 딸이며, 장인은 판개성윤(判開城尹) 진승서(陳承緖)이다. 이인민의 일문은 고려 공민왕에서 우왕에 이르는 기간에 최고의 권문세가를 이룩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0년(공민 19) 박상충(朴尙衷)이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는 이인민에게 선물하였던 『근사록』(보물, 1963년 지정)이 충재(冲齋) 권벌(權橃) 가문에 소장되어 있다.
공민왕 때에는 백형 이인복(李仁復)이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공민왕 말기에 중형 이인임(李仁任)이 실권자로 부상되어 우왕 재위 14년간 최고 권신으로 군림하였으므로 현직(顯職)에 중용되었다.
1383년(우왕 9) 4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문하평리 겸 대제학(門下評理兼大提學)에 올랐다. 1388년 정월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이인임이 숙청당하자 이에 연루되어 계림부(鷄林府)에 유배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1390년(공양 2) 5월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가 다시 멀리 유배되었다. 이듬해 정월 국대비(國大妃) 왕씨의 생일에 특사로 경외종편(京外從便: 개경 밖에서 주거)되었다. 뒤에 기용되어 겸밀직사사 판개성부사(兼密直司事判開城府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