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순(李忠純)은 1877년 2월 8일 충청도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부친 이병제(李秉濟)와 모친 한양조씨 사이에서 삼남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경삼(景三)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부친 이병제는 1894년 동학운동(갑오농민전쟁) 당시 연산현감을 지낸 바 있다. 조부는 동학운동 당시 반일 활동을 통해 농민군을 지원하였던 경력이 있다.
이충순은 1900년 10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9월 졸업하였다. 1904년 6월 서울에 주둔한 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에 견습 참위로 보임되었다. 이듬해인 1905년 4월에는 전라남도 광주에 주둔하던 진위보병 제4대에 전임되었고, 다시 같은 해 9월에 경기도 수원 주둔 진위보병 제1대대의 견습 참위로 보임되었다.
수원의 진위대에 배속된 이충순은 1906년 서울에 주둔하였다. 이어 그는 서울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의 견습 참위로 전임되어 군무에 봉직하였다. 한일 강제 병합을 위해 일제가 군대 해산을 감행하였을 때, 그는 서울시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에 항거하여 군인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남대문 부근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날 시위대군 전사자는 모두 79명으로, 이충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충순은 남상덕(南相悳)과 함께 남대문 시가전의 전사자 가운데 이날의 전투를 상징하는 인물로 역사상 기록되었다. 남상덕을 특기하는 이유는 일본군 대위 가지하라 요시히사〔梶原義久〕를 사살한 큰 전과를 올린 장본인이라는 데 있는 데 비해, 이충순을 기리는 이유는 효성과 애국정신을 겸비한 참된 군인상으로 평가한 데 있다. 서모 박씨가 가탁되어 이충순이 남긴 영결사(永訣辭)와 효행(孝行) 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결과 이러한 인물상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