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윤적(允迪), 호는 대산(臺山). 이인상(李麟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통(李通)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이경헌(李景憲)이며, 어머니는 송승희(宋承禧)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7년(효종 8)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서부터 관직을 시작하였다. 곧 6품으로 승진하여 성균관의 전적·사예·사성, 사헌부의 지평·장령·집의, 사간원의 정언·사간, 세자시강원의 필선·보덕·사서, 홍문관의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응교를 역임하였다.
이어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결성현감·서천군수를 지냈다. 1674년(현종 15)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어 형조·호조·공조의 참의를 지내고 승정원의 좌승지를 거쳐 대사간에까지 올랐다.
윤선도(尹善道)의 오만함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며, 윤휴(尹鑴)의 무리인 이유(李유)의 옥사를 형조가 관대하게 해주는 것에 대하여 논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의 편에 서서 예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때 임금의 뜻에 거슬려 외직 또는 산직에 임명되었고, 그 뒤로 조정에 올라오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