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해(靑海). 할아버지는 여진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불화(阿羅不花)이고, 아버지는 태조 배향공신(配享功臣)이며 개국공신 1등 청해백양렬공(靑海伯襄烈公) 이지란(李之蘭)이다. 부인은 태조 원종공신(原從功臣) 판사 동안로(童安老)의 딸이다.
개국원종공신 첨절제사(簽節制使) 이화상(李和尙)의 아우로 집안의 인사들이 조선 건국의 군사적 기반을 제공한 동북면(東北面) 세력의 주축으로서, 조선 초기에 권문세가(權門勢家)로 군림하였다.
여진 사람으로 18세에 낭장으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파격적인 대우였다. 여기에는 간접적으로 충혜왕 후 공민왕 기간에 여진인을 포함한 동북면 출신이 현저하게 고려의 중앙관료로 진출했던 배경이 자리하였다.
직접적으로는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로서 여진의 여러 추장을 통할해 대군사집단을 이룩한 휘하의 중핵 인물인 원나라의 천호(千戶)를 세습으로 책봉 받은 지란의 아들에 대한 음직(蔭職)이자, 공민왕의 동북면 사람에 대한 우대책 때문이었다.
1388년(우왕 14) 요동원정군이 위화도회군을 일으키자 우왕을 시종해 성주(成州)에 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과(李芳果)·이방우(李芳雨) 및 형 이화상 등이 탈출해 반군에 합세했으며, 남아 있던 동북면 사람과 여진 사람 1,000여 명이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면서 동북면 유력자들을 대거 공신에 책봉할 때 사복시정에서 상장군에 올라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1395년(태조 4) 공신전 15결과 특전을 명문화한 녹권(錄券)을 받았다. 1398년 보공대장군(保功大將軍)을 거쳐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아버지가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에 책봉되는 등 일족이 각별한 우대를 받았다.
아버지가 죽자 시묘(侍墓: 묘 곁에서 항상 생활하면서 묘를 돌보고 애도함.)를 하기 위해 북청에 기거하던 중, 1402년(태종 2) 이성계를 재옹립하려는 조사의(趙思義) 등 동북면 사람의 반란이 발생하자 탈출해 태종에게 귀부해 난을 조기에 종식시키는 데 공헌해, 1403년 임오공신(壬午功臣: 조사의 난 토평공신) 2등의 예에 준하는 사전(賜田) 40결을 특사(特賜)받았다.
1406년 도총제(都摠制), 3년 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거쳐 1415년 참찬, 1423년 판좌군도총제(判左軍都摠制)가 되고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태종의 총애를 받아 1411년 잠시 고향에 갈 때는 왕이 성밖까지 전송했다 한다. 시호는 무후(武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