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진(仲進). 이천규(李天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찬원(李纘元)이고, 아버지는 이경화(李景華)이며, 어머니는 최주명(崔柱溟)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숙종 45)에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1721년(경종 1)에도 장령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장령으로 활동하면서 임인년(壬寅年)의 옥사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주장했으며, 자신의 삼수설(三手說)을 피력하였다.
1725년(영조 1)에도 장령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이잠(李潛)의 추증 직책을 삭탈하고 역적들을 훈적(勳籍)에서 제거하여 임인년의 원통하고 억울함을 해소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듬해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1742년에는 함안군수로서 외직에 근무했으며, 1744년에는 중앙으로 복귀하여 장령을 역임하였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음이 인정되어 이듬해에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의 낭청(郎廳)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