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말생 ()

조말생
조말생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판서, 대제학, 영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근초(謹初), 평중(平仲)
사곡(社谷), 화산(華山)
시호
문강(文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70년(공민왕 19)
사망 연도
1447년(세종 29)
본관
양주(楊州)
주요 관직
판서|대제학|영중추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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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판서, 대제학, 영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근초(謹初)·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화산(華山). 보승별장(保勝別將) 조인필(趙仁弼)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서운관정(書雲觀正) 조의(趙誼)이다. 조용(趙庸)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01년(태종 1) 생원으로서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임용되었고, 감찰·정언·헌납을 거쳐 이조정랑에 승진되었다.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이 되었으며, 다시 장령·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1411년에는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잠시 배명되었으며, 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 등을 역임하고, 1418년에는 이조참판에 이르러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형조판서·병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26년(세종 8)에 장죄(贓罪)로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432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다음해에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1434년 9월에 지중추원사가 되고, 1435년에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대제학을 지냈다.

그리고 1438년에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42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으며, 1446년에 영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다음해에 죽었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모재집(慕齋集)』
『백헌집(白軒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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