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옥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중추원부사, 한산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군계(君啓)
시호
충정(忠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47년(충목왕 3)
사망 연도
1396년(태조 5)
본관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
주요 관직
밀직제학(密直提學)|이조판서|중추원부사
정의
조선 전기에, 중추원부사, 한산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군계(君啓).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돈(趙暾)이다. 조인벽(趙仁璧)의 아우이다.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귀화하여 함경도 용진(龍津)에서 살았으며, 그의 아들 조휘(趙暉)는 몽고가 쳐들어올 때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한 뒤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었다.

그의 아들 조양기(趙良棋)는 총관부원수를 지냈으며, 그 아들 조돈에 이르러 고려에 완전히 귀화하여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 작전을 도운 공으로 벼슬이 판서에 이르게 되었다. 형 조인벽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비 의비 최씨(懿妃崔氏)의 소생 정화공주(貞和公主)를 아내로 맞이했으므로, 이성계의 자부가 된다. 그리고 증조부 휘의 딸은 도조(度祖)이춘(李椿)의 둘째 부인으로서, 이성계와 이중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생애와 활동사항

음보로 1373년(공민왕 22) 산원(散員)이 되고, 1387년(우왕 13)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이성계 휘하에 종군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것을 건의하였다. 회군 후 최영(崔瑩) 등 구세력을 숙청하는 데 가담하고, 남은(南誾) 등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이성계의 만류로 중지되고,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승진하여 회군공신이 되었다.

1389년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한 뒤 신진세력의 중심 인물로서 척불운동(斥佛運動)과 전제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390년(공양왕 2)에 우대언으로서 정몽주(鄭夢周)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1392년 이성계의 천거로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해 정도전 등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며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1395년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가 병으로 죽었다. 어려서부터 지절(志節)이 있고, 서사(書史)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사대부들과 교유 관계가 깊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유경(劉敬: 뒤에 敞으로 개명)과 더불어 그에게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하였다. 풍채가 위려하고 장중하며 헛된 말을 하지 않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보이지 않았다. 응대하는 재주도 뛰어나서 명나라 사신이 올 때에는 반드시 접반(接伴)의 일을 담당하였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참고문헌

『고려사』
『태조실록』
『연려실기술』
집필자
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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