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더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으며, 특히 이항복(李恒福) · 신경진(辛慶晉) 등과 가장 친하였다. 1590년( 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館)에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대교에 승진되었으나 모함을 입어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있다가 이듬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다시 대교에 복직되고, 이어 전적에 승진되었다.
예조좌랑 · 정언을 역임할 때 남방의 왜구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죄없는 백성들만 괴롭힌 격이 되어 그들에 대한 회유 정책을 철회하고 힘으로 물리칠 것을 강변,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에게 우리 나라에서 명군을 철수하려는 것을 중지시키고, 또 초황(哨黃: 화약연료) 수만 근을 가지고 와 그 공으로 직강에 승진되었다.
1597년 어사로 군량미를 운반했는데, 그 양이 무려 40여 만 섬을 넘어 군량이 떨어지지 아니했다 한다. 1601년 강화부사가 되어 1년 만에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그 뒤 호남어사 · 충주목사 · 단산군수를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선치하여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1613년( 광해군 5) 광해군의 생모추존에 반대하여 파직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 뒤에 형조 · 호조의 참판,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검찰사(檢察使)로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지의금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뒤에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 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가면서 분조(分朝)의 호조판서에 임명하여 세자를 따라 전주에 갔으나 돌아와 병사하였다. 시조 4수가 『 해동가요』에 전한다. 시호는 소민(昭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