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이재명(李在明) 등과 함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의 처단을 기도한 애국지사이다. 일찍이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안창호(安昌浩) 등 민족지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아 독립사상이 투철하였다.
1909년에 일진회 회장 이용구가 주동이 되어 한국정부와 일제 통감부에 ‘한일합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매국행위를 감행하는 것에 대하여,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이재명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아 이완용·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의 박태은(朴泰殷)의 집에 모여 처단계획을 세웠는데, 조를 나누어서 조창호는 김정익(金貞益)과 함께 이용구를, 이재명·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錄)은 이완용을 각기 처단하기로 하였다.
또한, 전태선(全泰善)과 함께 무기수합의 책임을 맡아 김이걸(金履杰)을 통하여 권총을 구하였으며, 그 밖에 거사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거사준비를 마친 뒤 이들은 서울로 올라와 기회를 엿보다가 1909년 12월 22일, 종현(鍾峴) 천주교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벨기에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이재명의 주동으로 저격하였다.
거사현장에서 이재명은 체포되고, 뒤이어 이용구를 처단할 계획이던 조창호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