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백광운(白狂雲).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䄵)을 따라 일본군과 싸웠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만주로 망명해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뒤 동창생 신용관(申容寬) 등과 함께 합니하(哈泥河) 산골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의용군을 편성해 국내외로 횡행하면서 일제의 행정기관 파괴, 일본경찰 및 앞잡이들의 숙청 등 여러 방면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5월 강계(江界)에 출동해 문옥면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해 7월 이창덕(李昌德)을 시켜 후창(厚昌)에 출동해 친일파 악질군수 계응규(桂膺奎)를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21년 관전현(寬甸縣) 일대에서 침입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계속하여 관전·통화·임강(臨江)·유하(柳河) 등 각 현(縣)에 출동해 일제의 앞잡이 기관인 일민단(日民團)·보민회(保民會)·강립단(强立團) 등을 습격, 소탕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조직하고, 제1중대장에 취임해 군대를 모집하고 강계(江界)의 어뢰주재소를 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22년 해 8월 남만주 각지에 분산되었던 각 단체가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해 제1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덕원(全德元) 등 일부가 이탈해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는 등 내분이 일어나자, 김원상(金元常)·박응백(朴應伯) 등과 함께 탈퇴하고 통의부에 반감을 지닌 부대를 규합하여 항일 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뒤 압록강 철교 준공식 때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에 참여하였으며 참의장(參議長)을 역임하였다. 대한통의부의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