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박은 만년(晩年)에 자신이 지은 1,000여 편이나 되는 시를 순서대로 손수 편집하여 묶어 놓았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 전라북도 전주부윤(府尹)으로 나온 남언경(南彥經)이 양대박의 시 묶음을 빌려 갔다가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으며, 저자인 양대박 또한 1592년(선조 25)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가 과로(過勞)로 죽었다.
이후 양대박의 아들 양경우와 양형우(梁亨遇)가 평소 외우던 아버지의 시 70여 편과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 중 100여 편의 시를 찾아내어 시집 2권으로 편차하였다.
양경우는 1607년(선조 40)에 이 시집을 가지고 허균(許筠)을 찾아가 서문(序文)을 받고, 1608년(선조 41)에는 중국인 웅화(熊化)에게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여 주고 서문을 받는 등 양대박의 유고를 간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양경우는 장성현감(長城縣監)이 되었고, 다음 해인 1618년(광해군 10) 4월에 장성에서 『청계유고』 2권 1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初刊本)은 서두에 정탁(鄭琢)이 쓴 「양군전(梁君傳)」을 싣고, 저자인 양대박이 쓴 200여 편의 시를 시체(詩體)의 구분 없이 연대순으로 편집하였으며, 보유(補遺) 편에 예부시재(禮部試材) 때 지은 「상엽무풍자락(霜葉無風自落)」을 싣고, 끝으로 고경명(高敬命), 권벽(權擘) 등이 양대박에게 주거나 차운(次韻)한 시 13편을 부기(附記)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규 4516)에는 4권 2책의 봉인정사본(封印淨寫本)이 있다. 이 판본은 판심(板心)이 잘 정돈되고 체제가 갖추어져 있어 간행을 위해 준비된 정고본(定稿本)으로 보인다. 필사 연대는 미상이다. 이 필사본은 초간본에 비해 시문의 분량도 많아지고 전체적으로 편차를 다시 정비하면서 제목도 수정하는 등 많은 손질을 가하였다.
1799년(정조 23) 양대박 부자의 유문(遺文)을 모은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가 11권 5책으로 전라도에서 간행되었다. 이 중 권 16이 저자의 시문과 유사(遺事)이고 권 7·10은 아들 양경우의 유사와 『제호집(霽湖集)』이며, 권 11이 차자(次子) 양형우의 『동애집(東崖集)』이다. 권 3~6이 양대박의 시문인데, 그 구성과 편차가 봉인정사본과 또 다르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규장각(규 1494·1496)에 소장되어 있다.
봉인정사본 『청계집』의 구성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문에서 명나라 사신 웅화는 양대박의 문무겸전함을 제갈량(諸葛亮)에게 비견(比肩)하였다. 발문(跋文)에서 조위한(趙緯韓)은 양대박이 정사룡(鄭士龍)에게 시를 배워 종지(宗旨)를 얻었고, 박순(朴淳) · 정유길(鄭惟吉) 등과 이름을 날렸으며, 말년에는 백광훈(白光勳) · 이달(李達) · 권응인(權應仁)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고 하였다.
권 1에는 시 312수, 권 2에는 시 115수가 실려 있다. 권 3은 조선에 온 왜국의 사신을 목 베어 죽이자는 내용의 「청참왜사서상송강정상국(請斬倭使書上松江鄭相國)」,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병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격문(檄文)인 「창의격문(倡義檄文)」, 창의 시의 행적을 적은 「창의종군기(倡義從軍記)」, 주(註)만 있고 본문(本文)이 없는 「운암조전망의사제문(雲巖弔戰亡義士祭文)」, 세종의 간의대(簡儀臺)를 중수(重修)하라는 왕명(王命)에 의한 「중수간의대기(重修簡儀臺記)」, 「기우제문(祈雨祭文)」, 「제장자문(祭長子文)」, 「제학문(祭鶴文)」, 중국 역사의 인물론(人物論)을 개진(開陳)한 「도살이보국론(盜殺李輔國論)」 · 「조정장준숙우론(趙鼎張浚孰優論)」, 편지글 「정부백서(呈府伯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4는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 ·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부록으로 윤근수(尹根壽) · 권벽 · 고경명 등의 차운시(次韻詩) 15수, 정탁이 찬(讚)한 「양공전(梁公傳)」, 유근(柳根)의 「제정상국양공전후(題鄭相國梁公傳後)」 · 「제의병장양공문(祭義兵長梁公文)」, 이식(李植)의 「제창의격발(題倡義檄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성혼(成渾) · 윤두수(尹斗壽) · 윤근수 · 유희춘(柳希春) · 정철(鄭澈) · 고경명 · 박순 · 김천일(金千鎰) · 백광훈 · 이산해(李山海) 등과 수창(酬唱)한 것이 많고, 금강산 · 속리산 · 두류산 등지(等地)를 유람(遊覽)하면서 지은 시도 있다.
임제(林悌)와의 교유(交遊)를 엿볼 수 있는 시도 자주 보이는데, 양대박이 임제와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세속(世俗)의 구애(拘礙)로부터 벗어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달과 주고받은 시나 기생(妓生)에게 준 여러 시를 보면, 현실에 바탕을 둔 내용보다는 낭만적 경향이 주종(主宗)을 이룬다. 「면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은 송순(宋純)과의 교유와 함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이해하는 데에 단서가 된다.
양대박의 시는 중국 사신(使臣) 등달(滕達)에 의하여 『심경칠자시(瀋京七子詩)』로 묶이기도 하였다. 대표작 「청계(靑溪)」는 주지번(朱之蕃)으로부터 향기 나는 물에 손을 씻은 뒤에 보아야 할 정도라는 평을 받았다. 「봉정송강상국(奉呈松江相國)」은 평안북도 강계(江界)에 귀양 가 있던 정철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던 작품이다. 「송손곡객유용성(送蓀谷客遊龍城)」은 『기아(箕雅)』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