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서정이나 사색과 성찰을 산문으로 표현한 문학양식이다. 수필은 뜻 그대로 ‘붓을 따라서, 붓 가는 대로 써놓은 글’로서 무형식의 자유로운 산문이다. 수필은 개성적이며 고백적인 문학이어서 작가의 개성이 짙게 드러난다. 또한 제재 선택에 제한이 없어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다 자유자재로 서술할 수 있다. 한국의 수필은 크게 고전수필과 근대문학 형성 이후의 근대수필, 그리고 1950년대 전후의 현대수필로 나뉘며, 고전수필은 다시 한문수필과 국문수필로 나뉜다. 근대문학 형성 이후 본격적인 수필의 정립과 성숙의 단계에 있다.
수필은 문학 갈래 중에서도 독특한 성질을 지니는 문학이다. 시 · 소설 · 희곡과 같이 창작문학에 가까우면서도 형상화(形象化)에 의한 순수한 창조문학이 아니고, 비평적이면서도 이해와 성찰에 의해 평가에 이르는 순수한 비평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여 그 형상과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도 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새로운 양상과 지향성을 명쾌하게 제시하기도 하는 문학이다. 또한, 서정(抒情)과 서사(敍事)에 의한 정서적 감동이나 허구적 흥미를 주기도 하면서, 다른 문학 양식과의 상호 견인 작용을 적절하게 포용하여 그 영역은 광범위하게 확대하기도 한다.
수필은 그 뜻대로 ‘붓을 따라서, 붓 가는 대로 써놓은 글’이다. 시나 소설 · 희곡과 같이 어떤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한 초점으로 모아진 서정이나 사색을 그대로 산문으로 표현하는 문학이다. 고려 때의 이제현(李齊賢)이 『역옹패설(櫟翁稗說)』의 서문에서 말했듯이 한가한 가운데서 가벼운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 바로 수필이다. 즉, 그때그때 보고 느끼고 흥미 있는 것을 붓 가는 대로 산문으로 표현한 글이다.
수필은 중국에서는 남송(南宋)의 홍매(洪邁)가 쓴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비롯되고, 서양에서는 1595년 몽테뉴(Montaigne,M.E.de)의 『수상록(Essais)』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고려 때부터 서설(書說) · 증서(贈書) · 잡기(雜記) · 찬송(贊頌) · 논변(論辨) 등의 문장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다. 고려의 여러 문헌에 남은 수필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이민구(李敏求)의 『동주집(東洲集)』에 실려 있는 「독사수필(讀史隨筆)」이나 조성건(趙成乾)의 「한거수필(閒居隨筆)」, 박지원(朴趾源)의 「일신수필(馹迅隨筆)」 등이 특히 한국 수필의 새로운 발흥을 가져온 작품들이다.
수필은 그저 담수(淡水)와 같은 심정으로 바라본 인생이나 자연을 자유로운 형식에 담은 산문이다.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여 서정의 감미로움이 드러나기도 하고, 지성의 섬광이 번득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수필은 독자의 심경(心境)에 부딪치기도 하고 사색의 반려가 되기도 하여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하고, 철리(哲理)의 심오한 명상에 잠기게 하기도 한다. 따라서 수필은 소설의 서사성(敍事性)을 침식하고 시의 서정성을 차용(借用)하기도 하면서, 무한한 제재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표현하여 인생의 향기와 삶의 성찰을 더하게 한다. 이러한 수필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수필은 무형식의 자유로운 산문이다. 그것은 수필이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산문문학이면서도 구성상의 제약이 없이 자유롭게 쓰여지는 산문임을 말한다. 소설은 인물 · 배경 · 구성 등에 의한 구조적 제약에 맞게 써야 하고, 희곡은 무대에서의 상연을 전제로 하여 그 형식에 맞추고 미적 구조에 의한 주제를 형상화해야 하지만, 수필은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쓸 수 있다. 물론 수필도 일기체 · 서간체 · 기행문 또는 담화체(談話體)로도 쓰여지고, 서사적 형식, 극적 형식 등 여러 가지 산문으로 쓰여지기도 하나,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구성상의 제약은 받지 않는다. 내용면에서도 인간이나 자연의 어느 한 가지만 다룰 수도 있고, 여러 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토막토막 다룰 수도 있다. 수필을 ‘단상(斷想)’ · ‘편편상(片片想)’ · ‘수상(隨想)’이라고 이름하는 것도 수필의 이러한 자유로운 무형식성으로부터 연유한 말이다.
둘째, 수필은 개성적이며 고백적인 문학이다. 어떠한 문학 양식도 작가의 개성이 풍기지 않는 것은 없지만, 수필처럼 개성이 짙게 풍기고 노출되는 양식도 드물다. 시에서는 정서의 승화와 은유의 기법 속에 개성이 융합되고, 소설이나 희곡은 표현의 뒤에 개성의 향취와 분위기가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적나라한 심적 나상(裸像)과 개성이나 취미 · 인생관 등이 그대로 나타나는 자조적(自照的)이며 고백적인 문학이다. 말하자면 수필은 작가 자신과 ‘동질동체(同質同體)’라고 할만큼 개성적이며 고백적인 양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개성을 생생하게 나타내면서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수필의 특성이 있게 된다.
셋째, 수필은 제재가 다양한 문학이다. 어떤 문학 양식보다도 수필은 제재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인생이나 사회 · 역사 · 자연 등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다 자유자재로 서술할 수 있어서 그 제재의 선택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수필은 무엇이라도 다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이지만, 그러한 제재는 작가의 투철한 통찰력과 달관에 의해서 선택되어야 하고, 정서적 · 신비적 이미지를 거쳐 나오는 생생하고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
넷째, 수필은 해학과 기지(機智)와 비평정신의 문학이다. 수필은 상황의 단순한 기록이나 객관적 진리의 서술이 아니다. 알베레스(Albérès, R.M.)가 말한 대로 “수필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 신비적인 이미지로 쓰여진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서정의 감미로움과 입가에 스치는 미소와 벽을 뚫는 비평정신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주름살을 펴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할 수 있는 해학이 있어야 하고, 놀라 기겁하면서도 즐거움을 주는 기지가 있어야 하며, 얼음장처럼 냉철한 비평정신에 의한 오늘의 인식과 내일의 지표(指標)가 있어야 한다. 물론, 해학과 기지는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중요시하는 요소이며, 비평정신은 문학비평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특히 수필에서는 지적작용(知的作用)을 할 수 있는 비평정신이 그 밑받침이 되며, 시가 아니면서도 정서와 신비의 이미지를 그리게 하기 위해서 해학과 기지가 반짝여야 한다. 서정이 어린 지성의 섬광이 바로 수필의 특성인 것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수필은 일정한 형식이 없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어서 그 영역이 무한하게 확대된다. 시는 정서에 기반을 두고, 소설은 설화(說話)와 구성에 바탕을 두며, 희곡이 대화에 의한 문학인 데 반하여, 수필은 이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데에 그 독자적인 영역이 있다. 그러므로 수필은 전문화되지 않고 남은 창작적 변용을 용인하는 모든 산문문학적인 문장을 다 포괄하게 된다.
수필은 무한한 제재와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몽테뉴형의 경수필(輕隨筆)과 베이컨형의 중수필(重隨筆)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경수필은 신변 · 사색 · 서간 · 기행수필 등이며, 대개가 주관적 · 개인적 · 사색적인 경향을 띠고 있어서 ‘개인적 수필’이라고 한다. 중수필은 과학 · 철학 · 종교 등 주로 사회적인 관심과 객관적 · 경구적(警句的)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사회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수필은 비교적 가벼운 형식으로 개성이 강하게 노출되고, 신변적인 것을 정서적 · 시적으로 표현하는 주관적 · 사색적 유형으로서, 이양하(李敭河) · 이희승(李熙昇) · 피천득(皮千得) · 양주동(梁柱東) 등의 많은 수필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수필은 문장의 흐름이 가벼운 느낌을 주고, 표현이 개인적 · 주관적이며, ‘나’가 겉으로 드러나고, 개인적 감정이 정서로 짜여져 시적이며 신변적이다. 그러나 개인적 수필은 자칫 신변잡기나 지나친 자기 노출에 기울어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필은 지성에 바탕을 두고 신비적 · 정서적인 이미지로 감싸 질 때, 철학성과 예술성을 아울러 갖춘 수필문학이 될 것이다.
사회적 수필은 철학적인 사고나 과학적인 사실, 사회나 문화에 대한 비평을 사색적으로 서술하고 단언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 학자 · 사상가 · 교육자 등에 의해 쓰여진다. 주로 사회적인 수필, 즉 김진섭(金晋燮) · 김태길(金泰吉) · 안병욱(安秉煜) 등의 수필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수필은 문장의 흐름이 무거운 느낌을 주고, 사회적이며, ‘나’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보편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짜여져 있어 소논문과 흡사하며, 지적 · 사색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수필은 정서가 메마른 지식의 나열이나 설득과 경구의 과다로 흐르기 쉽다.
여기서 수필의 두 유형이 서로 견인, 조화하여 개인적 · 정서적 이미지와 객관적 · 지성적 논리를 함께 함으로써 ‘지성에 바탕을 둔 신비적 · 정서적 이미지에 의한 문학’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수필은 크게 고전수필과 근대문학 형성 이후의 근대수필 그리고 1950년대 전후의 현대수필로 나뉘며, 고전수필은 다시 한문수필과 국문수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고려 이후의 방대한 한문학에서 수필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고, 조선시대 문학에서 국 · 한문일기, 기행, 서간 등이 수필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주목된다. 근대문학 형성 이후에는 본격적인 수필의 정립과 성숙의 단계에 이른다.
한문수필은 고려에서 조선말에 이르는 한문으로 된 모든 수필류를 말하는 것으로 방대한 양을 이루고 있다. 대개의 경우 한문학에서는 잡기(雜記)나 필기(筆記) 등의 기(記), 야록(野錄)이나 쇄록(鎖錄) 등의 녹(錄), 전문(傳聞)이나 야문(野聞)의 문(聞), 총화(叢話) · 야화(野話) 등의 화(話), 쇄담(鎖談) · 야담(野談) 등의 담(談), 수필(隨筆) · 만필(漫筆) 등의 필(筆)의 문장이 수필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한문수필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4에 언급되어 있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閒話滑稽傳)』 · 『필원잡기(筆苑雜記)』, 최부(崔溥)의 『표류기(漂流記)』 등 18종뿐 아니라 이밖에도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 등 많은 문헌들에서 산견(散見)되는 수필들을 포함한다. 물론, 이 중에는 비평이나 소설적인 것들도 많아 일률적으로 수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들 중 수필적 성격의 문장들을 총괄하여 한문수필이라고 한다. 한문수필은 이제현이 『역옹패설』 서문에서 말한 대로 낙수를 벼룻물로 삼아 한가한 마음으로 수의수필(隨意隨筆)하여 울적한 회포를 풀거나, 닥치는 대로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평적인 것과 설화적인 것이 혼재해 있으나 대체로 수필적인 것이 매우 많다.
고려시대에는 『역옹패설』을 비롯하여 『백운소설(白雲小說)』 · 『파한집』 · 『보한집(補閑集)』 등의 문집이 있으며, 그 중 기행수필인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와 울지 않는 닭에 의탁하여 인사(人事)를 풍자한 김부식(金富軾)의 「아계부(啞鷄賦)」 등이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와서 한문수필은 크게 융성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 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村談解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최부의 『표해록(漂海錄)』,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記錄)』, 그리고 임진왜란 후에는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 여러 양상의 수필이 나온다.
그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파(北學派)의 거성인 박지원이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들어가 여행한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문수필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특히, 1780년(정조 4)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건너 요양(遼陽)으로 가는 15일간의 견문 · 풍속 등을 실은 「도강록(渡江錄)」과,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562리에 걸친 여행을 기록하면서 ‘북진묘기(北鎭廟記)’ · ‘거제(車制)’ · ‘희대(喜臺)’ · ‘점사(店舍)’ · ‘교량(橋梁)’ 등 짤막한 글을 수록하고 있는 「일신수필」이 유명하다. 그밖에도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 고증적인 수필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塞說)』, 보고 들은 것을 단편적으로 기술한 안정복(安鼎福)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인문지리지이면서 당시 인심의 기미를 담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등 여러 양상의 수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한문수필들은 관조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시인이나 묵객 등이 그들의 사상과 생활 감정을 여러 형태로 담은 것으로서, 비평적이면서도 해학과 풍자를 보여준다.
국문수필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주로 여인들에 의해 쓰여진 수필이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운문(韻文)이 성했으나 서민문학이 흥성해진 이후에는 주로 여인들에 의해 기행문이나 일기문 형식의 국문수필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국문수필은 궁정수필(宮廷隨筆) · 기행수필(紀行隨筆) · 의인체수필(擬人體隨筆)로 나누어진다.
궁정수필은 궁중에서 생활하던 여인들에 의해 쓰여진 수필로, 국문수필 중 그 분량이 가장 많고 또한 뛰어난 작품도 많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던 실상을 나인들이 기록한 「계축일기(癸丑日記)」,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등극 등 궁중 생활을 기록한 「한중록(恨中錄)」과 같은 것은 우아한 용어와 여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감정의 기미를 그리고 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의 군사 · 정치 생활을 기록한 「산성일기(山城日記)」, 사도세자의 참변을 그린 「혜빈궁일기(惠賓宮日記)」 등도 섬세한 필치의 궁중수필이다.
기행수필로는 1776년(영조 52)에 박조수(朴祖壽)가 지은 「남정일기(南征日記)」, 이희평(李羲平)이 1795년(정조 19)에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맞아 수원의 장헌세자 능에 참배하고 그 광경을 그린 「화성일기(華城日記)」 등이 있다. 김창업(金昌業)이 1713년(숙종 39) 청나라에 사행(使行)하고 그곳 견문을 기록한 『연행일기(燕行日記)』, 그리고 정조 때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등도 있다. 이 기행수필 중 뛰어난 것으로서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가 있다. 이 작품은 함흥판관 신대손(申大孫)의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가 쓴 것으로, 그 중 특히 일출광경과 월출광경이 묘사되어 있는 「동명일기」가 뛰어나서 기행수필의 백미로 꼽힌다.
한편, 의인체수필로는 순조 때 유씨 부인이 바늘을 부러뜨리고 애도하는 심정을 제문형식으로 쓴 「조침문(吊針文)」과, 일곱 가지 침선도구(針線道具)를 희화적인 대화로 쓴 「규중칠우쟁공기(閨中七友爭攻記)」가 유명하다. 이밖에도 숙종 때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스님과 양반의 유희적 문답을 쓴 「양인문답(兩人問答)」, 일장의 꿈을 그려 한량(閑良)을 풍자한 「관활량의 꿈」 등은 해학적인 내용으로 재미있게 쓰여져 있고, 기타 서찰양식(書札樣式)도 많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국문수필은 다양하면서도 섬세한 생활감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단순한 기록이나 사실적인 서술이 대부분이어서 본격수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근대수필은 처음에는 기행적인 수필로 출발하여 수상적 수필과 병행하다가, 1930년대에 와서야 산문문학의 한 장르로서 본격적인 수필로 형성된다. 본격적인 수필은 주로 한문수필과 국문수필로 이루어진 고전수필의 기행적 성격을 계승하고, 서구수필의 개성적인 시각을 수용하여 이원적(二元的) 근저에서 출발한다.
기행가사와 국문수필에서 계승된, 산수를 즐기고 기리는 기행적 수필과, 생활의 통찰이나 내적 세계의 성찰을 주로 하는 수상적 수필의 두 경향이 1920년대에는 상호 견인하면서 병행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필이 형성된다. 이것은 1895년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태동하여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李光洙)의 기행적 수필, 박종화(朴鍾和) · 변영로(卞榮魯) 등의 단상(斷想) · 상화(想華) · 만필(漫筆)과 같은 명칭으로 일컫던 수상적 수필이 병립(竝立), 상충(相衝)하면서도 본격적인 수필의 기초가 되고 있다. 물론, 1910년대 『학지광(學之光)』(1914)이나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1918) 등에 발표된 일련의 수필이 근대수필을 태동시킨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수필은 1910년대의 태동기, 1920년대의 병립 · 상충기, 1930년대의 형성기, 1940년대의 침체기로 나뉘며, 1950년대 이후 전후문학(戰後文學)에 이르러 현대수필의 단계로 넘어간다.
① 1910년대의 수필 : 『학지광』에 선보인 최승구(崔承九)의 「남조선의 신부」(1914), 나혜석(羅惠錫)의 「이상적 부인」(1919) 등은 근대수필의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붓 가는 대로 쓰면서도 완결과 통일미를 갖춘 개성적인 수필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기행 소감이나 단상의 양상을 띠어 근대수필의 초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최남선의 「반순성기(半巡城記)」(소년, 1909.8.)나 「평양행(平壤行)」( 소년, 1909.10.), 『청춘(靑春)』 7호에 발표된 한샘의 「동경 가는 길」(1917.5.) 등은 기행수필의 양상을 띠고, 『학지광』에 발표된 최승구의 「남조선의 신부」, 전영택(田榮澤)의 「독어록(獨語錄)」(1916), 나혜석의 「잡감(雜感)」(1917. 4.), 이광수의 「천재야, 천재야」(1917.4.), 『태서문예신보』에 발표된 이일(李一)의 「만추(晩秋)의 적막」(1918.11.) · 「고독의 비애」(1918.12.) 등은 수상수필의 양상을 띤다. 이들 수필은 기행의 소감과 거기에 서린 역사의 시각, 그리고 내성적인 성찰이 많아 문인들의 자아각성에 의한 새로운 문화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격동기를 살아가는 시각이 생활주변과 자아에 대한 내향적 성찰로 변이하고 있음을 말한다.
최남선이 근대적 잡지인 『소년』이나 『청춘』을 펴내면서도 비교적 기행수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반면, 다른 작가들은 일본에 의해 중개된 서구의 자아의식을 수용하여, 사물과 자아를 투시하고 성찰하는 새로운 양식의 수상적 수필을 보여준다. 그러나 1910년대의 이러한 수필의 태동은 시나 소설에 비해 그 의식이 투철하지 못하여 수필이라는 장르를 확고하게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시는 최남선 · 최소월(崔素月), 소설은 이광수 · 현상윤(玄相允) 등 그 장르의 작가가 뚜렷이 나타나는 데 비해, 수필은 뚜렷이 내세울 수 있는 작가가 없이 누구나 붓을 들어보는 비장르적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왜소한 기행적 수필이나 양적으로 많은 수상적 수필 등은 1920년대의 정립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② 1920년대의 수필 : 근대수필의 형성기인 1920년대의 수필문학은 수필 장르의 정립, 그리고 기행수필과 수상수필의 병립 양상으로 나타난다. 1920년대에 발표된 수필적인 문장으로는 ‘기행’이라는 장르 명칭으로 김환(金煥)이 쓴 「고향의 길」( 창조 2, 1919), 남궁벽(南宮璧)의 ‘오산편신(五山片信)’ 「자연」( 폐허 1, 1920), 박종화의 ‘감상(感想)’ 「영원(永遠)의 승방몽(僧房夢)」( 백조 1, 1922), 이광수가 쓴 ‘상화(想華)’ 「감사(感謝)와 사죄(謝罪)」(백조 3, 1922), 주요한(朱耀翰)이 쓴 ‘감상수필’ 「어렸을 때 본 책」( 조선문단 18, 1927) 등이 있어 그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명명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에 ‘수필(隨筆)’이라는 명칭이 보이며, 『동광(東光)』에 이르러 그 명칭이 굳어진다. 이렇게 수필이 여러 명칭으로 불린 것은 수필 양식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 혼동된 양상이며, 후반기에 수필이라는 명칭으로 포용된 것은 수필 양식이 형성, 정착되어감을 의미한다. 『조선문단』 18(1927.1.)의 ‘수필감상’란에 주요한 · 방인근(方仁根) · 김억(金億) · 최상덕(崔象德) 등 11명의 수필이 실려 있음은 그러한 정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1920년대의 수필양식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조선문단』과 『동광』이다. 『조선문단』은 시(노래) · 소설 (창작)란과 더불어 수필란을 정하여 고정시켰고, 『동광』은 종합지이면서도 매월 대여섯 편의 수필을 발표하여 수필문학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광수의 「의기론(義氣論)」 · 「우덕송(牛德頌)」 등 문학적 향취가 서린 본격적인 수필도 여기에 발표된 것이다.
생활과 인생에 대한 통찰과 달관으로 개성적 성찰을 보이는 수상수필은 1920년대 수필의 한 경향을 이룬다. 오상순(吳相淳)의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犧牲)」(폐허 1, 1920)에서는 시대상황을 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광수의 「우덕송」에는 덕을 지향하는 의미가 아로새겨져 있고, 최학송(崔鶴松)의 「그리운 어릴 때」에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동심이 그려져 있다. 또한, 염상섭(廉想涉)의 「국화(菊花)와 앵화(櫻花)」(조선문단 16, 1925)에는 꽃의 의미로써 망국민의 심경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수필의 또 다른 경향은 최남선과 이광수에 의한 기행수필이다. 『서유견문』과 그 맥락이 이어지는 이 기행수필은 산수를 즐기며 거기에 묻힌 역사와 민족혼을 찾으려는 시도로서,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와 같은 작품으로 나타난다. 이미 「남유잡감(南遊雜感)」(청춘 14, 1918)을 발표했던 이광수가 금강산의 수려한 산수와 그 유적에 깃들인 인생과 역사를 점철한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1925), 이미 「반순성기」를 썼던 최남선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옛날 마한인(馬韓人)을 주로 한 백제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 쓴 「심춘순례(尋春巡禮)」(1926)와, 백두산을 찾아 역사적인 안목으로 개인적인 심정이나 사적(史的) 정황을 그린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1927) 등은 기행수필의 3대 백미를 이룬다. 이러한 기행수필은 그 뒤 『기행 지리산』(조선일보사, 1937) · 『산(山)찾아 물따라』(박영사, 1966)의 이은상(李殷相)에 와서 더 세련되어진다. 이와 같은 1920년대의 수상수필과 기행수필은 병존하면서 193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필문학으로 정착하게 된다.
③ 1930년대 이후의 수필 : 1930년대에 오면 문학적 수필이 발표되고, 수필이론이 정립되어 본격 수필문학의 시대로 들어간다. 또한, 수필문학 전문지인 『박문(博文)』이 나오고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등에 수필 고정란이 설정되어 수필의 발표 광장이 많이 마련된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수필의 이론적 추구, 개인적 수필과 사회적 수필이라는 본격적인 수필유형의 형성, 그리고 발표 무대의 확장 등과 더불어 근대수필의 성숙을 이루게 된다. 먼저, 수필론의 정립은 외국 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에 의해 추구된다. 김기림(金起林)은 「수필을 위하여」(신동아, 1933.9.)에서 수필의 문학성과 그 영역을 추구하고, 김광섭(金珖燮)은 「수필문학소고(隨筆文學小考)」(문학 창간호, 1934)에서 수필의 형식과 그 표현에 대한 이론을 모색하며, 김진섭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동아일보, 1939)에 이르면 비로소 문학 양식으로서의 수필론이 정립된다.
1930년대는 이렇게 수필론의 정립으로 그 지향성이 마련되고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어 그 성숙기를 맞는다. 그것은 1935년 『조광(朝光)』이 속간되고, 『박문』 · 『문장』 · 『인문평론』 등 수필의 발표 무대가 마련되고, 이병기(李秉岐) · 김진섭 · 이양하 · 정내동(丁來東) · 고유섭(高裕燮) · 고형곤(高亨坤) · 이상(李箱) · 이효석(李孝石) · 이희승 등 많은 작가들이 의욕적으로 수필을 발표한 결과로 이루어진 현상이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 『동광』에 100편, 『조광』에 450편, 『박문』에 130편, 『문장』에 260편, 『인문평론』에 50편 등 도합 990편으로 거의 1,000편의 수필이 발표된다. 또한, 질적으로도 김진섭의 「인생예찬(人生禮讚)」 · 「교양(敎養)의 문학(文學)」, 이양하의 「신록예찬(新綠禮讚)」, 이광수의 「산거기(山居記)」(문장, 1939.7.), 이희승의 「청추수제(淸秋數題)」, 이효석의 「청포도의 사상」(조선일보, 1936.9.), 이상의 「권태(倦怠)」 등 뛰어난 수필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이러한 본격적인 수필은 수필문학의 두 양상인 개인적 수필과 사회적 수필의 유형을 형성하게 한다. 개인적 수필로서는 이양하의 「신록예찬」 · 「조그마한 기쁨」, 이효석의 「사온일(四溫日)」 · 「화초」, 피천득의 『금아문선(琴兒文選)』의 수필, 노자영(盧子泳)의 「산사일기(山寺日記)」, 김유정(金裕貞)의 「그믐달」 등이 있는데, 대체로 직관적 · 관조적이며 자연과 인생을 투시하고 그에 몰입하는 경향을 띤다. 사회적 수필로는 김진섭의 「인생철학」과 「주부송(主婦頌)」, 이상의 「권태」, 고유섭의 「고려청자」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체로 깊은 성찰이나 진리를 단언적으로 표현하여 본격적인 수필의 또 하나의 경향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 전개된 본격적인 수필은 이광수의 「인생의 향기」와 이은상의 「무상(無常)」과 같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또한 김진섭의 「생활인의 철학」이나 이상의 「권태」와 같은 사색의 앙금을 보이기도 하며, 김유정의 「그믐달」이나 이희승의 「청추수제」처럼 싱그러운 감상이 담겨 있어, 시나 소설과 더불어 1930년대 문학을 성숙하게 한다.
그러나 1940년대는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신문 · 잡지들이 폐간되면서, 시나 소설처럼 수필도 침체현상을 보이게 된다. 또한, 광복 직후에도 남북 대립과 민족문학 모색의 혼란 속에서 수필은 새로운 변모를 가져오지 못한 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이미 발표한 수필들을 정리하면서, 박종화의 『청태집(靑苔集)』(1942), 이광수의 『돌베개』(1948), 김진섭의 『인생예찬』(1947), 이양하의 『이양하수필집』(1947) 등이 간행된다. 이밖에 마해송(馬海松)의 『편편상』(1948) · 『속편편상』(1949) 속의 날카로운 감각,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跡巡禮)』(1948) 속의 민족의식의 심화 등이 이 시기에 주목된다. 이처럼 근대수필은 태동과 정립 · 성숙 · 침체기를 지나 1950년대의 새로운 변모를 지향하게 된다.
1950년대 이후 현대수필은 1930년대의 성숙된 수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6 · 25전쟁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에 상응하는 다양한 제재의 수용과 수필인의 확대는 시나 소설 이상으로 수필문학의 새로운 변모를 가져오게 한다. 수많은 잡지에 발표되는 문인 · 비문인들의 수필은 연 600∼700편이 넘어 이제는 수필의 팽배기를 맞고 있다. 그러면서 조지훈(趙芝薰)의 「지조론(志操論)」과 같이 한 역사적 의미를 집약시킬 수 있는 작품도 적지 않으며, 소설 이상의 흥미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많은 독자에게 수필이 수용되고 있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의 김형석(金亨錫), 「빛이 그리울 때」의 김태길, 「문학과 인생」의 조연현(趙演鉉) 등과 같이 철학적인 사고나 통찰 그리고 인생의 관조를 박력 있는 필력으로 설득하는 경향의 사회적 수필과, 「보리」의 한흑구(韓黑鷗), 「제사」의 전숙희(田淑禧), 「우화」의 조경희(趙敬姬), 「까치」의 윤오영(尹五榮), 「바보네 가게」의 박연구(朴演求), 「다리가 예쁜 여자」의 윤재천(尹在天) 등과 같이 인생의 성찰과 자연의 몰입에 의한 심성을 서정화하는 개인적 수필의 경향으로 변모해 간다. 또한 김남조(金南祚) · 신달자(愼達子) · 문정희(文貞姬) · 유안진(柳岸津) 등과 같이 여류 특유의 서정으로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응시하고 미화하며 찬미하는 여류수필도 한 새로운 경향으로 부각한다. 이러한 현대수필의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제재의 다양성과 수필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취미와 시각의 확산에 의해 수필의 제재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수필은 제재의 구애를 받지 않는 장르이나 현대수필은 더욱 제재의 다양성과 수필인의 전문성이 흩어져 수필은 수필가의 전유물이 아니고 누구나 쓸 수 있는 장르로 확대되고 있다. 최신해(崔臣海)의 「심야의 해바라기」 · 「문고판 인생」 · 「제삼의 신」 등과 같이 의학적 산고와 낚시를 제재로 한 수상, 법정(法頂)의 「무소유」 같이 불자나 교역자의 종교적 사유, 이영도(李永道)의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 서정범(徐廷範)의 「놓친 열차가 아름답다」와 같이 인간의 심층 세계나 무속(巫俗)의 신비, 전규태(全圭泰)의 「잉카와 마야 문명」과 같이 새 풍물을 탐방한 이색적인 수필, 김우종(金宇鍾)의 「우리들만의 우정」과 같이 인생의 통찰, 구인환(丘仁煥)의 「신서유견문」 · 「한번 사는 세상인데」와 같이 이국 견문과 인생과 역사의 성찰과 비판 등 제재의 다양한 양상과 비전문인의 많은 수필창작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둘째, 수필형식의 다양한 양상이나 무형식성이 그 특성으로 규정되어 있기는 하나 그 규제를 벗어나 소설의 서사성을 도입한 사건 서술이나 시의 삽입, 극적 상황의 설정, 복합구조 등 새롭고도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셋째, 수필문학성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수필로 발표되는 수많은 작품은 수필의 문학적 영토를 확대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수필의 문학성을 저하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 수필문학의 정리작업이 필요하게 된다.
넷째, 수필인의 증대와 발표무대의 확대이다. 많은 문예지와 『한국수필』(조경희) · 『수필문학』(강석호) · 『현대수필』(윤재천) · 『수필공원』 · 『수필창작』(오창익) · 『수필과 평론』(이철호) · 『수필춘추』(정동화) 등과 같은 수필 전문지, 그리고 수많은 잡지가 수필을 발표할 수 있는 확대된 무대이다. 또한, 문인이나 비문인이 모두 수필을 씀으로써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양식이 되고 있다.
다섯째로 수필문학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수필문학의 이론적 연구와 그 자료의 정리로 수필문학의 새로운 장르적 정지와 체계화에 힘쓰고 있다. 대학에서의 수필론의 강의는 줄었으나 전문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 수필론의 강의와 그 창작적 실천과 수필의 생활화의 장이 넓어져 수필의 진작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으로 1년에 600∼700편의 수필이 발표되는바, 현대를 수필의 홍수시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현대수필은 다산(多産) 속에서의 문학 영토 확대의 공(功)과 더불어 질적인 저하 문제를 안은 채, 다음과 같은 과제를 지니고 있다. 즉, ① 장편수필의 궤도화, ② 수필문학의 문학성 향상, ③ 산업사회에서 수필의 생활화를 위해 수필도서관 건립, ④ 대학에서의 수필문학 강좌 설치의 확대, ⑤ 수필문학의 연구와 그 사적 정리를 위한 지원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면서 현대수필의 지향성과 그 좌표도 설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