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분은 지방에 따라 초빈(草殯)·외빈(外殯])·소골장(掃骨葬)·초장(草葬) 또는 고름장·구토·풍장·최빈·덕대초분·건풀·질·떡달·손님떡달 등 다양하게 불린다. 그 절차는 임종에서부터 입관과 출상까지 유교식으로 하되,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땅이나 돌축대, 또는 평상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서 1∼3년 동안 그대로 둔다.
그 동안 명일(命日:돌아간 날)이나 명절에는 그 앞에서 제수를 차려 제사를 지내다가 살이 썩으면 뼈만을 추려 다시 땅에 묻는다. 따라서, 초분이라는 이름도 관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만든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장법은 일반적인 유교식 장례가 단 한 번의 매장으로 끝나는 단장제(單葬制)임에 비하여서, 두 번의 매장절차를 거치는 복장제(復葬制)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때 뼈를 깨끗이 씻거나 찧어서 살을 모두 떼어낸 다음에 매장을 하기도 하며, 세골장(洗骨葬) 또는 증골장(烝骨葬)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초분은 유골을 처리하기에 앞서 먼저 육신을 처리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부터 ≪수서≫ 고구려전, 그리고 ≪삼국유사≫ 등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장례에 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지석묘나 백제 초기의 옹관묘 등도 그 구조로 보아 뼈만을 묻은 복장제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조사에 따르면, 조선 말기까지는 육지지방에서도 이러한 초분이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요즘에는 주로 서남해안의 도서지방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라도 지방에서는 특히 이 초분이 씻김굿 즉, 무속의 사령제(死靈祭)와 복합되어 나타나고 있어 학술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세골장은 태평양을 둘러싼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 형태도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공통점은 모두 뼈를 중요시하고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분포와 함께 우리 나라의 초분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크게 전파론과 독립발생론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파론에서는 남방문화 요소로서의 복장제 또는 세골장을 강조하고 있으며, 독립발생론에서는 인간의 정신성의 보편성에 의해서 전파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는 더 이상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기원에 대한 문제는 유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초분을 통해서 뼈만을 가려내어 매장하는 장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관습으로 보인다. 첫째, 살은 더러운 것으로, 땅속에 매장함으로써 땅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둘째, 뼈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셋째, 뼈를 땅에 매장하는 것은 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함께 지하에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넷째, 육신을 바로 땅속에 매장하는 것은 박정한 것으로서, 육신을 조금이라도 더 지상에 두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다섯째, 육신은 완전히 죽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탈육이 된 뼈로써 비로소 죽음을 확인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여섯째, 지상에서 탈육을 시켰을 때에라야 뼈가 검게 되지 않고 희게 되기 때문에 뼈를 깨끗이 하여 지하에 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등이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초분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가졌던 여러 가지 시신관념이 복합되어 남아 있는 문화잔존물의 하나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