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禪僧). 성은 이씨(李氏). 속명은 학일(學一), 자는 봉거(逢渠). 충청북도서원(西原:현재의 청주시) 출생.
11세에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뒤에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를 깨닫고, 경률론(經律論)을 아울러 배웠다.
특히, 대반야(大般若)에서 삼매력(三昧力)을 얻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의 질병을 구하였다. 1085년(선종 2)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천(義天)이 천태종을 개창하자, 선종의 승려로서 천태종으로 옮겨간 이가 10명 중 6, 7명이었지만, 그는 홀로 선종을 지켰다.
1099년 (숙종 4) 의천이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회(圓覺會)를 개설하고 그를 부강사(副講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하루는 원각회에 참석한 9세의 왕자, 곧 후일의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證儼)으로 불리운 어린 왕자가 위독하자 이를 구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의천이 학일을 청하였는데, 그가 가만히 대반야를 염(念)하자 소생하였다. 이에 의천이 더욱 존경하였고, 왕명에 의하여 법주사(法住寺) 주지가 되었다.
1106년(예종 1)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 주지로 있다가 곧 구산사(龜山寺)로 옮겼다. 1108년에 선사(禪師), 1113년에는 내제석원(內帝釋院)의 주지가 되었다. 1114년에 대선사(大禪師), 1117년에 안화사(安和寺)의 주지가 되었다. 1122년 왕이 병중에 내전으로 불러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다가, 예종이 죽은 뒤 인종이 즉위하여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하였다.
1123년(인종 1)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그가 기우(祈雨)하여 효과가 있었다. 1126년 운문사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남(安南)의 경암(瓊嵒)에 머무르게 하였다.
1129년 운문사로 물러가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에게 “자기를 밝힘에 힘쓰고, 선열(禪悅)의 여가에 힘써 보시를 행하라.”고 가르쳤다.
1142년 2월 8일에 산불이 크게 나 대중이 끄지 못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산을 향하여 축원하자 이내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 1144년 11월 15일에 발병, 12월 15일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왕이 예를 갖추어 국사(國師)에 추증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고 하였다. 운문사에 그의 비가 전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