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였던 정여창(鄭汝昌)의 고택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들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 정병호의 고조부가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서산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연대가 올라가서 청하(淸河)현감을 지낸 선조가 300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널찍널찍한 돌로 포장한 골목길에 들어서서 한참을 가야 막다른 듯한 곳에서 솟을대문을 본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揭示)한 문패가 4개나 편액(扁額)처럼 걸려 있다. 원래의 집이 이 터에 있어서 500여 년을 연기(延基)하여오는 명기(名基)의 터전으로 풍수지리설을 운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한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內樓)가 전출(前出)한 구조이다.
‘文獻世家(문헌세가)’ · ‘忠孝節義(충효절의)’ · ‘百世淸風(백세청풍)’ 등을 써 붙인 사랑채는 전퇴(前退)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지그시 앉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다시 문을 지나야 안채에 들어서게 되는데, 원래 중문채와 문밖의 곳간채는 따로 있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으며, 그와 별도로 일곽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사랑채의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 : 굽은 기둥)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초석을 삼은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주목되는 구조로는 사랑채 앞마당 끝 담장 아래에 석가산(石假山)의 원치(園治)가 있다. 보통은 후원에 주력하여서 앞마당에는 취평(取平)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나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게 조산(造山: 인공산)을 꾸몄다.
산석(山石)을 떠다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좌우를 그보다 낮게 하고 그 아래에 심곡(深谷)을 의태(擬態)하는 석곡(石谷)의 형성과 알맞은 배열로 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는데, 엄격한 법도에 따르고 있고 고형을 남겼다.
지금은 나무들이 웃자랐고 후대에 적절하지 못한 나무들이 첨가되어서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게 되었다. 이 집은 전기한 대로 여러가지 특색이 있어 구조적인 특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예스러운 대로 제자리에 보존되고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공부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따라서, 조선 중기 · 후기 주택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