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숙경(叔京), 호는 무주(無住)·동락(東洛).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의 후손이며, 홍언국(洪彦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경삼(洪景參)이고, 아버지는 무반인 홍덕록(洪德祿)이며, 어머니는 목사(牧使) 유승선(柳承善)의 딸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나이 20세에 유성룡(柳成龍)을 만나 그에게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의 아들 홍대엽(洪大燁)을 승문원에 등용하자는 시론이 있었으나,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권지(權知)에 오르고, 이듬 해 전적을 거쳐 박사에 이르렀다. 그 뒤 외직으로 안동부제독을 자청하였다. 그리고 1623년(인조 즉위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정경세가 호소사(號召使)가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난의 진압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와 폐모에 반대하다가 인조반정 후 아들과 함께 자살한 박승종(朴承宗)의 적몰사(籍沒事)에 공정한 견해의 소를 올렸다가, 훈신들의 미움을 사 영변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1628년 예조정랑, 1630년 사예(司藝), 이어 종부시정(宗簿寺正)·장령·승지·공조참의·흥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용병술로 포수를 지휘하였다. 1640년 예조참의·동부승지, 1643년 우부승지 등을 거쳐, 1645년 대사간이 되었다.
인품이 깨끗하고, 영욕과 이해타산이 없어서 강직한 자로 평을 받았다. 문신이면서도 용병에 관한 지식이 많아, 국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무주일고(無住逸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