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정리사업은 1904년부터 시작된 구화폐의 정리사업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한일간의 통상무역은 급격히 진전되었고 무역결제수단으로 일본화폐가 사용되어 일본화폐의 한국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근대적 화폐제도는 많은 불편과 손실을 초래했고 일본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해 한국에 근대화폐가 통용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열강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은본위 화폐제 도입 등의 노력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결국 1904년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근대화폐제도 확립을 위한 화폐정리사업이 추진되었다.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가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변화를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침략의 기반을 다지려는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 하에 추진되어 한국정부의 화폐에 대한 지배권이 사실상 일제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일간의 통상무역은 급격히 진전되었고, 무역결제수단으로 일본화폐가 사용되어 일본화폐의 한국 진출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확대 발전된 국제무역과정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유통체제, 즉 전근대적 화폐제도가 초래하는 통상거래 상의 불편과 경제적 손실이 적지 않았으므로 근대화폐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한국과 빈번한 경제적 접촉을 가지게 된 일본으로서도 그들의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해 한국에 근대화폐가 통용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조선정부에 이것의 도입 및 실시를 권유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890년대 초부터 상설 조폐기관으로서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고 근대조폐기술을 도입해 근대화폐제도를 실시하려 하였다. 또 일본은 선진 기술과 자본을 매개로 정부당국의 화폐정책 시행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려 하였다.
1892년에 정부가 일본측의 권유로 일본의 화폐제도에 의거해 은본위 화폐제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를 제정, 시행하려 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신식화폐조례」의 시행은 화폐권의 수호를 위한 정부당국의 저항과 당시 일본세력의 한국 침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의 반발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보다 능률적으로 수행하는데 소요되는 자국화폐의 한국 진출을 합법화시킬 목적으로 은본위제의 채용을 골자로 하는 「신식화폐발행장정」을 조선정부로 하여금 제정, 실시하게 하였다.
「신식화폐발행장정」은 그 자체가 내포한 제도적 모순과 일본의 화폐권 침탈 시도에 대한 정부당국자들의 반발 내지 저항으로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1901년에 이르러서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을 지키려는 정부와 지식계층의 저항, 일본과 민감하게 대립 갈등하고 있는 러시아 세력의 한국 조정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로 마침내 폐지되고 말았다.
동시에 한국정부는 금본위 화폐제도의 채용을 골자로 하는 「화폐조례(貨幣條例)」의 제정을 공포하였다. 실제로 일본 은화의 통용을 억제하는 반면, 러시아 화폐의 체제를 본뜬 각종 주화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1901년의 「화폐조례」는 일본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일본의 압력 밑에서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메가타[目賀田種太郎]를 그 해 9월 재정고문으로 고용, 국가재정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다.
한국의 재정문제는 물론 금융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한을 가진 메가타는 침략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문란한 화폐제도의 재정비, 즉 화폐정리작업으로부터 재정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메가타의 건의를 받아들인 한국정부는 이 작업에 착수하였다. 정부는 화폐제도 문란의 가장 큰 원인이 전환국에서 악화인 백동화(白銅貨)를 남발하는 데 있다고 보고 1904년 11월에 먼저 전환국을 폐지하였다.
당시 국내의 화폐유통 상황은 경상도 · 전라도 · 함경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상평통보의 유통이 지배적이었고, 평안도 · 황해도 ·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주로 백동화가 유통되고 있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메가타는 이처럼 화폐유통의 지역적 기현상과 악화 백동화만이 남발되어 인플레이션 등 여러 가지 모순과 폐단이 만연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다음과 같은 화폐정리방안을 세웠다.
첫째, 화폐가격은 금을 표준으로 물가의 표준을 정하기로 하고, 보조화인 백동화는 분별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보조화를 발행하기로 하였다.
둘째, 화폐정리방법으로서 한국의 화폐본위는 일본과 동일하게 하고, 한국정부는 일본정부 또는 일본정부의 보증을 받아 자금을 차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화폐의 기초와 발행화폐를 일본과 완전히 같게 할 것, 한국화폐와 동일한 일본화폐의 국내 유통을 인정할 것, 본위화폐 및 태환권은 일본의 것으로 하든지 아니면 일본 태환권을 준비로 하여 일본정부의 감독 및 보증에 의한 은행권으로 할 것, 보조화는 모두 한국정부에서 발행할 것 등 구체적인 방책을 세웠다.
셋째, 화폐정리의 순서는 우선 「화폐조례」를 실시하기로 하고, 다음 일본화폐의 국내 유통을 공인해 한국정부의 수지(收支)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화폐조례」에서 규정한 화폐의 종류 중 5전 백동화와 반환(半圜) · 20전 은화 체제를 개정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화(舊貨)를 회수하고 백동화는 통용 기한 및 인환(引換)기한을 정해 인환, 회수하기로 했으며, 적동화(赤銅貨)나 상평통보는 일정기간 뒤에 제한액을 한정해 회수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이상과 같은 화폐정리방침을 세운 메가타의 건의에 따라 1905년 1월에 ‘화폐조례 실시에 관한 건’, 즉 1901년의 「화폐조례」의 실시를 공포하였다. 이로써, 정부는 1901년 법률상으로만 채택해 놓았던 금본위 화폐제도를 실질적으로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화폐조례 실시에 관한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본국 화폐의 가격은 금을 가지고 기초를 삼아 본위화의 근거를 공고히 한다. 제2조 위 조항에 의해 1901년 칙령 제4호로 정한 「화폐조례」는 올해(1905) 6월 1일부터 실시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당시 실시된 「화폐조례」는 같은 해 10월에 공포된 ‘화폐조례 중 개정의 건’에 의해 10전과 반전(半錢) 보조화가 부가되고 적동 보조화가 청동 보조화로 변경된 내용의 것이었다.
1905년 「화폐조례」가 공포된 날에 ‘형체양목(形體量目: 화폐의 생김새와 가치)이 동일한 화폐의 무애통용건(無碍通用件)’과 ‘구화폐 정기교환(訂期交換)에 관한 건’이 칙령으로 공포되었다. 전자의 공포로써 일본화폐도 한국화폐와 같이 국내에서 자유로운 통용이 허용되었다.
후자의 칙령에서는 구화 10냥(兩) 은화는 신화 1환(圜) 금화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부의 편의에 따라 점차 교환하거나 회수할 것, 구백동화의 교환 및 회수는 1905년 7월 1일부터 시작해 교환종료기간을 만 1년 뒤로 하고, 기한이 끝난 뒤에는 그것의 통용을 금지하되, 다만 그 뒤에도 6개월간에는 계속 공납(公納)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1905년 1월 말에 화폐정리에 관한 사무를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으로 하여금 집행하게 하고, 화폐정리의 비용 및 자금 300만환을 이 은행에서 차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두 가지 조약을 다이이치은행과 체결하였다.
그 해 3월에 일본정부는 칙령으로써 주식회사 다이이치은행으로 하여금 한국 화폐정리사무와 관금 취급(官金取扱) 및 은행권 발행업무에 대해 서울에 설치한 지점을 한국 총지점으로 하고 한국 내 각 지방의 지점 · 출장소 및 대리점을 총괄하게 하였다.
이로써, 다이이치은행은 한국 중앙은행의 위치에서 한국의 화폐정리에 관한 준비를 하고, 1905년 6월초에 화폐정리 처리법을 제정, 7월 1일부터 화폐정리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화폐정리, 즉 화폐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구백동화의 정리작업이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통되고 있던 구백동화의 유통량은 전환국 주조발행액 약 1700만원(元), 기타 사주(私鑄)나 위조된 것이 600만원으로, 도합 2300만원으로서, 통화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화폐정리의 성공여부는 구백동화의 정리 여하에 달려 있었다.
이에 한국정부는 1905년 6월 초에 탁지부령(度支部令)으로 ‘구백동화 교환에 관한 건’ 및 ‘구백동화 교환 처리순서’를 공포하고, 7월 초부터는 구백동화의 교환이 시작되었다. 1908년 1월 탁지부령으로써 그 해 12월 말까지는 구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한이 끝난 뒤 6개월 동안에 한해 그것을 공용(公用)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
정부당국은 각 농공은행(農工銀行) 및 지방 금융조합을 통해 구화를 매수하고, 또 상인들데게 교환조합을 결성시키고 수수료를 지급, 구화폐를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화폐정리에 대한 취지가 각 지방까지 충분히 주지, 선전되지 못해기 때문에 1909년 5월에 칙령으로써 구화폐의 공납 기한을 12월 말까지 연기하였다. 구백동화 교환을 개시해 기한이 끝날 때까지 회수된 총액수는 960만 8636환 64전이었다.
상평통보[엽전]은 1678년(숙종 4) 이래 법화로 통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그것은 구백동화와는 달리 급격히 정리하려 하지 않고 1905년 7월 탁지부대신령으로 국고수납을 통해 환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상평통보의 환수비가(還收比價)는 처음에는 1매를 1리(厘) 5모(毛)로 결정했으나, 뒤에는 지동(地銅)의 시장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1908년 6월에는 2리로 다시 조정하게 되었다. 환수 개시 이래 1910년까지의 환수 실적은 327만 8958환 18전에 달하였다. 구백동화나 상평통보 이외의 구은화 및 구동화는 1905년 1월 칙령으로 환수하기 시작했는데, 구화폐 2원에 대해 신화폐 1환의 비가로 환수되었다.
그러나 이 구은화나 구동화는 본래부터 주조 발행된 액수가 많지 않았는 데다가 악화인 구백동화에 의해 유통계로부터 구축되어 통용량이 적었기 때문에, 1910년 5월까지의 환수량은 구동화가 40만 72환 50전이고 구은화가 8만 3282환 5전에 불과하였다.
환수된 은화 · 동화 · 백동화는 모두 용산중앙금고(龍山中央金庫)의 용해부에서 용해되었다. 그리고 은은 일본 대판조폐국(大阪造幣局)으로 보내어 신화폐 주조를 위한 재료로 사용하고, 기타 백동이나 동은 모두 매각 처분해버렸다.
1904년 전환국이 폐지된 이후에는 한국 화폐의 주조는 일본 대판조폐국에 의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1905년부터 신화폐의 주조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신화폐 주조작업을 개시한 이후로 지은(地銀) 및 지동의 가격이 등귀해 1912년 8월 「화폐조례」를 개정해 화폐의 명목가치를 높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이래로 주조 발행된 신화폐는 점진적으로 환수하면서 새로 제정한 양목(量目)에 따라 신화폐를 주조하게 되었다. 1910년 5월까지의 주조 액수는 147만 5700환이었고, 다시 주조한 화폐의 액수는 69만 3800환이었다.
정부는 1905년부터 화폐정리사업에 착수해 구화폐를 환수하는 동시에 신화폐를 발행해 유통을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866년에 악화 당백전(當百錢)을 주조, 유통한 이래 중국 동전 · 당오전(當五錢) 및 백동화 등 각종 악화의 남발로 초래된 심각한 타격은 신화폐의 유통보급과정에 큰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정부당국이 발행하는 신화폐의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은행 및 각종 금융기관을 통해 무이자로 대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화폐의 유통을 보급하였다. 이러한 당국의 시책에 따라 1910년 5월까지 신화폐의 유통고는 435만 8487환이었다.
1901년 이래로 다이이치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이 화폐정리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본다. 1905년의 「화폐조례」에서는 일본화폐의 국내 통용은 무조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 또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중앙금융기관으로서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은 공사 유통거래에서의 통용이 공인되었다.
1909년 11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업무 일체가 인계되어 은행권도 계승되었다. 한국은행권이 발행될 때까지 다이이치은행권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이이치은행권은 시장의 유통계에서 경화(硬貨)의 유통량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상과 같이, 한국정부가 일본세력의 적극 개입하에 추진한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는 창설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화폐제도 창설로 말미암아 농촌의 자연경제는 분해가 더욱 촉진되어 농민은 토지와 생활재료 및 노동수단으로부터 축출되고,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4년 이래로 실시된 화폐정리, 즉 화폐제도 개혁과정에서 초래된 특이한 사태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상인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나타나는 금융상의 핍박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울 종로의 상인들 사이에는 금융상의 혼란, 즉 전황(錢荒)이 일어나 경제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상인이 상점문을 닫고 도망가거나 혹은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당국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품질을 갑 · 을 · 병으로 구분해 갑종과 을종의 것은 매수하고, 품질이 나쁜 병종의 것은 매수하지 않았다. 당시 관주(官鑄) 백동화도 그러하였지만, 사주(私鑄) 또는 위조된 백동화의 수량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당국이 품질이 나쁜 백동화에 대해 무가치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 가운데에는 도산하거나 탕업(蕩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