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 황징(黃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준원(黃浚源)이고, 아버지는 황탕경(黃湯卿)이며, 어머니는 오결(吳潔)의 딸이다.
진사로서 1574년(선조 7) 별시 문과에 급제해 주서·공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의주로 몽진해 온 선조를 잘 모셔 그 해 8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의주목사로서 명나라 원병을 접대하는 소임과 병량(兵糧)을 수운(輸運)하는 일을 잘하지 못했다는 대간의 질책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 해 7월 공조참판에 역임 중 주청사(奏請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진병(進兵)·철병(撤兵) 등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주청(奏請)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국경에서 배회하다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임의로 사행길을 바꾸어 용천(龍川)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중 조정의 독촉을 받고 경략지(經略地)에 도착함으로써, 명나라 원병이 늦게 파병되는 실책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잠시 문책을 받았으나 1594년 6월에 전주부윤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전주수비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1595년 의주부윤이 되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원병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1599년 행호군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정헌(正憲)으로 승계해 부호군·형조판서·공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인망은 부족했으나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에 몽진했을 때 좋은 인상을 준 덕에, 중대한 실책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관력은 비교적 평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대명관계에서 활약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