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모두 10첩으로 표지마다 ‘천금물전’이라 썼는데 이는 ‘천금을 주더라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동진 왕희지가 스승인 위부인의 「필진도」를 읽고 난 뒤 자신이 평생 경험한 바를 적어 자손에게 남긴 「제위부인필진도후(題衛夫人筆陣圖後)」의 끝 구절에서 나왔다.
각 첩에 실린 필적은 다양하다. “東山明月(동산명월) 北窓淸風(북창청풍)”이나 “城西草堂(성서초당) 梅軒竹塢(매헌죽오)” 등의 대자 글씨, 서호(西湖) 주변의 감흥을 읊은 절구, 12가지 향기 나는 완상식물[十二芳玩: 江梅·杜鵑·蘭·蓮·丹桂·黃菊·松·竹·石榴·冬柏·石竹·杜蘅]에 대한 절구, 동쪽 정원의 8가지 짝[東園八伴: 琴·鶴·詩·酒·書·畵·劒·碁]에 대한 고시, 자신의 8가지 애완물(長生瓢·九節杖·古劒·玄琴·書案·棋局·梅藏·怪石)에 대한 명(銘)과 시 등이다. 내용은 산천의 자연물과 소박한 소유물에 정을 붙여 자족하는 삶을 보여준다. 또 조선과 당나라 명시인의 절구, 『논어』·『주역』 등과 『당서(唐書)』·『남사(南史)』 열전이나 『고사전(高士傳)』 구절, 자연에 깃들어 탈속하게 살던 옛 인물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 독서와 풍류를 즐긴 옛 문인에 관한 일화 등이다. 특히 오중선(吳衆先)의 『소창자기(小窓自記)』, 진계유(陳繼儒)의 『소창유기(小窓幽記)』 등 명대의 소품문(小品文)이 자주 보인다. 이밖에 “육우당(六寓堂)”, “매산(梅山)”, “황려(黃驪)”, “이하진인(李夏鎭印)”, “하경(夏卿)” 등 성명·자호·본관 인장이 찍혀 있다.
필사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이하진의 시문집 『육우당유고』 제2~3책 「서호록(西湖錄)」에 실린 8수의 시가 쓰여 있어 얼마간 짐작된다. 서호는 1680년(숙종 6)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대거 조정에서 밀려날 때 이하진도 그해 5월 파직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나 10월 초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되기까지 머물던 곳이다. 이곳은 오늘의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서강(西江) 일대인데, “성서초당(城西草堂)”이 이를 말한다. 또 ‘천금물전’이란 표제가 왕희지 53세 때의 글에서 나왔듯이 1680년은 이하진도 53세가 되는 해로 모처럼 한가한 여유가 나자 왕희지처럼 자손에게 길이 전할 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글씨는 다양한 크기로 썼는데, 해서는 왕희지 소해(小楷) 서풍울 바탕으로 했으나 획이 비교적 무르고 짜임이 느슨한 편이며, 행서는 해서를 흘려 쓴 정도로 초솔하다. 이에 비해 초서는 가는 획으로 분방한 필치를 보이는데 16세기 초서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서풍을 따랐던 숙부 청선(聽蟬) 이지정(李志定)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천금물전』 10첩은 17세기 문인의 애호완상 경향과 이하진의 노년 서풍을 살필 수 있는 예이다. 특히 그의 초서는 숙부 이지정에게 전수받아 아들 이서(李漵)·이익(李瀷) 형제 및 이서의 제자 윤두서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남인 초서풍의 한 갈래를 이룬 점에서도 소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