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포르멜 (informel)

회화
개념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타시즘(Tachism) · 다른 미술(Art autre) ·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이칭
이칭
타시즘(Tachism), 다른 미술(Art autre),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정의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타시즘(Tachism) · 다른 미술(Art autre) ·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개설

주로 볼스(Wols)의 작품과 관련해 프랑스 비평가 미셀 타피에(Michel Tapie)가 1950년에 고안한 용어로 이후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한 양식으로 1940년대 중반에 시작하여 1950년대에 번성한 유럽의 회화운동을 가리키게 되었다. 때때로 타시즘(Tachism), 다른 미술(Art autre) 또는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으로도 불린다. 앵포르멜 미술은 형태가 미술가의 표현적 충동에 종속되는 추상의 한 유형으로, 기하학적 추상의 냉정한 이성주의와 대립된다. 앵포르멜의 선례는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폴 클레(Paul Klee)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실질적인 선구자는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볼스, 한스 아르퉁(Hans Hartung)과 같이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한 미술가였다. 앵포르멜 미술운동에 가담한 작가로는 장 미셀 아틀랑(Jean-Michel Atlan),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 알프레드 마네시에(Alfred Manessier), 조르주 마티유(Georges Mathieu), 앙리 미쇼(Henri Michaux),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니콜라스 드 스타엘(Nicolas de Stael),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 등이 있다.

연원 및 변천

앵포르멜은 프랑스의 비평가인 미셀 타피에가 1950년에 주로 볼스의 작품과 관련하여 사용한 용어로 1940∼50년대에 나타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한 유럽회화운동을 지칭한다. 빠른 속도와 즉흥성이 강조되는 앵포르멜 미술은 전전의 기하학적 추상에 나타난 냉정한 이성주의와 대립된다. 기법에 따라 행위적, 서체적 붓터치를 강조하는 미쇼, 마티유, 물감의 질감, 촉각적 성질을 강조하는 타피에스, 드 스타엘, 보다 통제되고 구성과 색채를 의식하는 바젠느, 마네시에, 폴리아코프 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특히 미쇼, 뒤뷔페, 포트리에 등과 같은 미술가들이 가졌던 재료와 신체적 행위에 대한 관심은 앵포르멜 미술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뒤뷔페의 낙서, 미쇼의 잉크 얼룩, 볼스의 뿌리고 긁는 기법 등은 모두 미술을 기원에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추상표현주의처럼 서구문명의 위기에 직면하여 기원으로 돌아가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철학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1945년 포트리에의 ‘인질’전, 1946년 뒤뷔페의 ‘오트 파트’전, 그리고 1947년 볼스의 개인전은 미셀 타피에가 자신의 새로운 미학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전시회였다. 그 후 타피에는 일련의 전시기획을 통해 전후 파리의 미술가들 사이에 공유된 감성을 규정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펼쳐갔다. 타피에가 ‘앵포르멜’이라는 용어의 범위와 의미를 확대하고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은 폴 파세티 화랑(Galerie Paul Faccetti)에서 1951년 10월과 1952년 6월, 두 번에 걸쳐 기획한 ‘앵포르멜의 의미(Significants de l'Informel)’전과 1952년 12월에 역시 파세티 화랑에서 열린 ‘다른 미술(Un art autre)’전이었다. 이들 전시회에는 뒤뷔페, 포트리에, 마티유, 미쇼, 리오펠, 세르팡(Jaroslav Serpan), 아펠, 프란시스, 아르퉁, 마타, 폴록, 리시에, 리오펠, 술라주, 토비, 볼스 등 다양한 미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었고, 특히 ‘다른 미술전’ 함께 발행된 도록에 포함된 그의 글은 형식적 미학의 관례에서 해방된 앵포르멜 미학의 선언서였다.

타피에 자신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니라 극도로 희소한 진정한 개인들이다.....진정한 개인은 과거가 아니라 그의 가능성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함으로써 어떤 유파나 운동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가 주창했던 앵포르멜 미술은 다른 여러 나라에 전파되면서 미술운동의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앵포르멜 미술에 대한 연구는 그 후에도 지속되어 장 폴랑(Jean Paulhan)은 1962년 출판된 자신의 저서 『앵포르멜 미술(L'Art informel)』에서 앵포르멜 회화의 선구자에 피카소나 브라크까지 포함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대시키고, 나아가 “앵포르멜은 적어도 모든 규칙과 이미 형성된 모든 형태, 즉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든 형태들을 기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화가의 행동을 가장 명백하게 드러낸다는 장점이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지후에 앵포르멜 미술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그것이 전통과 결별하고 전쟁을 유발한 정치적 권위주의의 분위기와 단절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정치적 탄압을 받던 미술가들에게 앵포르멜 미술은 해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앵포르멜 미술은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신사실주의(Nouveau Realisme)와 팝 아트(Pop art)같은 미술운동의 도전을 받아 약화되었다.

내용

한국미술계에서는 ‘앵포르멜’이라는 용어가 1956년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평가이자 후에 앵포르멜 미술 운동에 뛰어든 김영주는 이미 1956년 3월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현대미술의 조형 의식을 대변하는 신표현주의의 한 유형으로 앵포르멜을 제시했고 파리에 체류하던 나희균도 제12회 살롱 드 메 소식을 전하면서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에 대한 피상적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외에서 전개되는 미술의 흐름에 대한 소개의 차원에서 앵포르멜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고, 앵포르멜 미술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관심과 이해는 1957∼58년 타피에의 일본 방문으로 일어난 앵포르멜의 열기가 불어 닥친 1958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프랑스의 앵포르멜 미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58년 3월에 발행된 『신미술』제8호에 마티유가 작품을 제작하는 광경을 찍은 사진 2컷과 함께 실린 「“앙 훌멜” 운동의 본질」이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이 글은 한국미술계에 있어서 최초로 앵포르멜 미술의 배경과 의미를 다루었고, 또 2개월 뒤인 5월에 개최된 현대미협 3회전에서 앵포르멜 경향의 작품이 출현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앵포르멜 미술의 구심점은 1957년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였다. 김창렬, 하인두, 김서봉, 문우식, 장성순, 김영환, 김충선, 박서보, 전상수 등에 의해 주도된 이 협회는 1961년 ‘60년미협’과의 연립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기까지 집단적 운동을 주도하며 한국 미술계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한국 미술계에 앵포르멜의 열풍이 밀어 닥친 배경에는 전후의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평론가 이일은 “6ㆍ25 사변은 우리나라의 정신적 풍토를 기묘하게도 제2차대전 후의 유럽의 그것에다 직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20대에서 전쟁을 가장 참혹하게, 가장 절실하게 살아낸 우리의 젊은 세대와 2차대전 후의 유럽의 폐허를 방황하는, 이른바 아프레게르(apres-guerre, 전후)라는 현대문명과 전쟁의 사생아들 사이에 맺어진 체험적인 공감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종의 ‘불신의 세대’였고, 급기야는 안이한 유산을 버리고 세계의 흐름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연소하려는 세대였다”고 기술하였다. 앵포르멜 미술은 60년대 중반까지 ‘현대작가초대전’이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같은 전시공간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지만 그 후 서서히 냉각되며 70년대의 모노크롬 회화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의의와 평가

앵포르멜 미술을 계기로 한국 미술계는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양식과 늦게나마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국제적인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앵포르멜은 양식적인 면에서 분명 서구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권위에 대한 도전, 개인의 표현과 창조적 자유의 존중과 같은 개혁적이고 전위적인 움직임이었고 서구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수용이었다고 평가된다. 앵포르멜의 실험정신은 많은 미술가들에게 국제적 흐름에 눈에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60년대 이후 한국미술계에 추상을 유행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20세기의 한국미술2: 변화와 도전의 시기』(김영나, 예경, 2010)
『현대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이일, 열화당, 1991)
「전후추상미술계의 에스페란토, ‘앵포르멜’ 개념의 형성과 전개」(정무정, 『미술사학』17, 2003)
「추상표현주의와 한국 앵포르멜」(정무정, 『미술사연구』15, 2001)
「해방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전개」(김영나, 『미술사연구』9, 1995)
Un Art autre (Tapie, Michel. 1952)
L'art informel (Paulhan, Jean. Paris: Editions Gallimard, 1962)
집필자
정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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