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뉴욕 미술계에 등장한 추상미술운동이다. 행위를 강조하는 액션 페인팅과 물감을 화면 전체에 고르게 바르는 색면 회화로 세분하기도 한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럽의 앵포르멜이 1950년대 후반에 전해지면서 변별력을 갖지 못하고 동일한 미술로 수용되었다. 운동의 구심점은 김창렬, 하인두, 김서봉 등의 주도로 1957년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젊은 세대가 주도한 전위적 미술로 한국 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을 표현할 조형 언어를 제공해 주었다.
원래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작품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950년대부터 뉴욕의 추상미술운동을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표현적이긴 하나 본질적으로 구상적인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작품과 추상적이나 표현적이라 볼 수 없는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작품을 포괄한다. 따라서 행위를 강조하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과 물감을 화면 전체에 고르게 바르는 색면 회화(Color-Field Painting)로 세분하기도 한다. 이들 모두에 공통되는 특성으로 1)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이 주어지지 않고 전체가 강조되는 전면적 구성 2) 끊임없는 행위와 운동감 3) 위, 아래의 구분 제거 4) 창문으로서의 개념이 아닌 대상으로서의 회화개념 제시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정보원으로는 흔히 미국잡지가 거론된다. 당시 『민국일보』 기자였던 이구열은 “뉴욕 중심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 폴록, 데 쿠닝, 마더웰, 로드코 등의 작품이 특집으로 소개되던 『라이프(LIFE)』나 『타임(TIME)』 잡지에서 찢어낸 원색도판이 그들의 지저분한 작업실 탁자와 벽면에서 흔히 목격”되었다고 증언하였고, 평론가였던 방근택도 『타임』, 『라이프』, 『아트 뉴스』 등의 잡지가 미국 미술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었다고 진술했다. 한국 미술가들이 미국잡지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추상표현주의는 비전통적 기법이 강조되고, 그 기법에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시대의 표현이자 자유라고 하는 이념적 가치의 구현이라는 해석이 가해진 모습이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럽의 앵포르멜에 대한 정보가 1950년대 후반에 동시적으로 전해지면서 별다른 변별력을 갖지 못하고 동일한 미술로 수용되었다. 추상표현주의의 구심점은 1957년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였다. 김창렬, 하인두, 김서봉, 문우식, 장성순, 김영환, 김충선, 박서보, 전상수 등에 의해 주도된 이 협회는 1961년 60년 미협과의 연립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기까지 집단적 운동을 주도하며 한국 미술계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한국 미술계에 소위 뜨거운 추상인 추상표현주의의 열풍이 밀어 닥친 배경에는 한국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개된 추상표현주의는 “우리는 이 지금의 혼돈 속에서 생에의 의욕을 직접적으로 밝혀야 할 미래에의 확신에 걸은 어휘를 더듬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 수립되었던 빈틈없는 지성 체계의 모든 합리주의적인 것들을 박차고, 우리는 생의 욕망을 다시 없는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온 세계의 출발을 다짐한다”는 1958년 현대미술가협회의 선언문에서 드러나듯 젊은 세대가 주도한 전위적 미술이었다. 추상표현주의는 60년대 중반까지 현대작가초대전이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같은 전시공간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지만 그 후 서서히 냉각되며 70년대의 모노크롬회화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을 표현할 조형언어를 제공해주었고, 현대미협전 외에 현대작가초대전이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을 통해 전개되면서 아시아의 전통에 대한 관심과 정치현실을 반영하는 등 한국의 현실에 적응한 양식으로 정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