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협회는 1956년 설립된 현대적 조형을 내세운 미술가들의 단체이다. 창립 당시 이십 대의 젊은 작가들로서 저항 의식에서 그룹을 형성하였다. 현실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미술을 주창하며 기성의 화단에 반기를 들었다. 앵포르멜 회화의 물질성과 비형태성이 전후 감성을 표출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간주되었다. 1957년 김영환, 이철, 김종휘, 장성순, 김청관, 문우식, 김창열, 하인두가 1회전을 열었다. 1960년까지 총 6회전을 열었다. 1962년 ‘60년미술가협회’와 통합하여 ‘악뛰엘’을 결성함으로써 해산되었다.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과거와 달리 크게 변한 오늘의 조형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함과 동시에 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여러 봉건적인 요소에 대한 반기를 들고자 하였다.
1956년 5월에 결성한 ‘4인회’가 발전하여 김서봉, 김영환, 김종휘, 김창열, 김청관, 김충선, 나병재, 문우식, 이철, 장성순, 조동훈, 조용민, 하인두 등 젊은 미술가들이 현대미술가협회를 설립하였다. 1957년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공보원화랑에서 김영환, 이철, 김종휘, 장성순, 김청관, 문우식, 김창열, 하인두 8인이 1회전을 가졌다. 1957년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화신화랑에서 있었던 2회전에는 창립 회원도 아니었고 1회전에서 빠졌던 박서보가 참여하였고 김창열, 김서봉, 이수헌, 이양로, 김영환, 이철, 장성순, 김충선, 정건모, 전상수, 조동훈, 김청관이 참여하였다.
1958년 5월 15일부터 22일까지 화신화랑에서 있었던 3회전에는 김창열, 김청관, 이철,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박서보, 이양로, 전상수, 조동훈, 나병재가 참여하고 있다. 같은해 11월 28일부터 12월 8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있었던 4회전에는 김서봉, 김창열, 김청관,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조동훈, 조용익, 하인두가 참여하였다. 1959년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린 5회전에서는 선언문을 채택하였고, 김서봉, 김용선, 김용익, 김창열, 나병재, 이명의, 이상기, 이양로, 이용환, 장성순, 정상화, 조동훈, 조용익, 하인두였다.
1960년 12월 4일부터 20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있었던 6회전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기금 조성을 위한 기획전 형식으로 베니스비엔날레 참여 작가들과 앵포르멜의 작가 카렐 아펠, 미셀 타피에 작품의 도판을 함께 전시하였다. 전상수, 김용선, 김창열, 박서보, 이명의, 이양로, 장성순, 전상수, 정상화, 조동훈, 조용익이 출품하였다. 회원의 드나듦이나 사정으로 작품을 출품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서 해마다 회원의 구성원이 변화하였고 이론가로서 방근택이 사적인 교류를 통하여 활동하였다.
1961년 12월, 4.19 이후 급변한 사회 분위기에서 급속히 식어가는 앵포르멜에 대한 열기를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60년미술가협회’와 연합전을 하였다. 1962년 더욱 발전적인 방안인 “미술이념과 행동윤리를 조율하기 위하여” 현대미술가협회는 자신들보다 아래 세대인 60년미술가협회와 통합하여 악뛰엘을 결성함으로써 해산되었다.
창립 당시 이십 대의 젊은 작가들로서 저항의식에서 그룹을 형성하였다. 현실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미술을 주창하며 기성의 화단에 반기를 들었다. 이는 국전을 기반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정면도전하는 새로운 행동이었다. 제1회 현대미술가협회전에서 밝힌 선언문에서 ‘협회의 기구’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서 구태의연하며 봉건적인 구조라고 생각했던 당시 화단에 대한 ‘조직적인’ 대응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9년 5회전에서 발표한 선언문은 “바로 어제까지 수립되었던 빈틈없는 지성 체계의 모든 합리주의적인 것들을 박차고, 우리는 생의 욕망을 다시없는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온 세계의 출발을 다짐한다. 세계는 밝혀진 부분보다 아직 발들여 놓지 못한 광대한 기여(其餘)의 전체가 있음을 우리는 시인한다.”라며 새로운 미술에의 열망을 표출하였다. 앵포르멜 회화의 물질성과 비형태성이 전후 감성을 표출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간주되었고 이전의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화면은 젊은 작가들이 공유한 ‘새로움’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일제식민 치하에서 성장하여 6.25전쟁기에 미술대학을 다닌 세대로서 사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세대이자, 전쟁 중 양적으로 팽창된 미술대학 출신 작가로서 기득권에 대한 반발이 예견된 세대였다. 시대를 담은 새로운 미술양식에 대한 자각과 공동의 이념을 미술의 양식으로 삼아 앵포르멜을 태도이자 양식으로 확립한 젊은 미술가들의 대명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