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생으로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평양미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하였으며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하였다. 1960년 자신의 조각연구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수의 기념조각상을 제작하였다.
평양미술학교 시절에 월북한 인천 출신 조각가 조규봉에게서 기념조각기법을 사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미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술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채 도피생활을 하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였다고 박고석은 기록하였다. 1952년부터는 광주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탁연하·박제소와 함께 상무대 〈을지문덕상 〉(1953)에 공모하여 차근호 안이 채택되자 이들 외에 김찬식·김순득이 함께 참여하여 완성하였다.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부조〉(1954), 육군사관학교의 〈범무상 〉(1957), 연무대 〈무명용사기념상〉(1958), 육군사관학교 〈화랑상〉(1960), 〈호국상〉(1960)을 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미술가협회전·현대작가초대전 등에도 출품하였고 1957년 망우리 이중섭의 묘비, 1960년 수유리 이무영의 묘비, 망우리의 화가 함대정의 묘비를 제작하였다. 순수조각 작품으로는 〈성모상〉(1956), 〈순교자를 위한 기념비〉(1956), 〈해저음〉(1959), 〈대지〉(1960), 〈달〉(1960)이 있다. 또한, 아방가르드를 수용하는 국전 쇄신과 동상조각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는 글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60년 4월 26일 동아일보사가 추진하는 〈4.19희생학생위령탑〉 설계에 설계와 제작을 자원하였는데, 27일에 서양화부의 정창섭·박서보·김창렬, 건축부의 안병의·김수식·송종석, 조각부의 김영중·김영학·최기원·최만린, 평론부의 방근택 등이 건립위원회를 자진 구성하여 또한 자원하였다. 이에 동아일보사는 공모를 실시하였고 9월 6일에 김환기·주원·김중업·방근택·김재원·김양선·최순우·이규상·이균상·이상범 등의 심사위원은 엄덕문·이윤형·김영중·최기원이 합작한 작품과 차근호의 작을 가작으로 선택하여 이 두 팀이 합작하든지, 단일안을 다시 제출하도록 하였다. 심사위원이 특정 학교와 연관된 점이 지적되며 편파판정에 관한 시비가 일어나자 재공고하였고 결국 12월 14일 이일영의 안이 1등, 차근호의 안이 2등으로 선정되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2월 17일 차근호는 조선일보사에 유서를 보낸 후 조각연구소에서 음독으로 생을 마쳤다. 당시 세간에서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4.19희생학생위령탑〉에 있다고 여겨졌으며, 심사위원이었던 이병도는 이일영의 안이 서양의 것을 모방하지 않은 창의적인 것으로 차근호의 것과는 200점 이상이나 점수 차가 났다고 술회하였지만, 박고석은 “패거리와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 남한 화단에 대해서 부조리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고 반박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