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출신. 1937년 경성제일고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35년 여름에 김복진미술연구소에서 조각을 배웠던 터라 조각에 뜻을 두어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1945년에 졸업하였다.
도쿄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제3회 재동경미협전에 작품 「손(手)」을 출품하였다. 졸업 후 서울에서 경기상업학교, 경기중학교 미술교사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가협회를 탈퇴한 미술인이 1946년에 조직한 조선조형예술동맹 조각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9년 상반기에는 백범 김구의 모친 「곽낙원여사상」을 제작하였다. 11월에 있었던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성관음상」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왜색이 짙고 도상이 파괴되었다는 비판과 부드럽고 기량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이 재건되자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경기중학교교장 관사에서 동상을 제작하고 있었으며 9.28수복 때 월북하였다.
월북 직후부터 1953년까지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 미술강좌 초빙교원으로 있으면서 주로 위인들의 반신 조각상을 제작하였다. 1954년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활동하다가 조각공예분과 지도원, 1958년부터 1975년까지 공예분과위원장을 하였고 이후에는 평안북도에 거주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김구의 어머니가 독립운동가들을 위하여 동냥을 하는 모습을 조각한 사실주의적인 조각 「곽낙원여사상」이다. 월북 이후 1955년 제작한 「농민군상」은 문학예술상2등상 수상작으로 당시 내각청사 현관에 3미터 높이로 시멘트로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그 해 제작한 「희망의 노래」는 전후 시대적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표현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5년작 「지상낙원」은 깊이있는 사색과 정서적인 여운을 안겨주는 성과작이라 평가되고 있다. 조각 「천리마동상」, 벽화 「해돋이」(학생소년궁전) 이외에도 북한지역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제작하였고, 공예작품으로 도자기 「복숭아형주전자」, 「목동과 처녀」, 「모란꽃형주전자」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