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기관으로, 전시체제하 미술인의 집단적인 친일활동을 위한 조직이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전신이다. 발기자는 김인승⋅심형구⋅이상범과 일본인 카타야마탄(堅山坦)⋅히요시 마모루(日吉守)⋅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미키 히로시(三木弘)⋅에구치 케이시로우(江口敬四郞)⋅토오다 카즈오(遠田渾雄)⋅토바리 요시테루(戶張幸男)⋅이가라시 미츠구(五十嵐三次)⋅하마구치 요시테루(濱口良光)⋅오하시 마코토(大橋實)⋅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였다.
일제가 사회 전체를 전시체제로 재편하자 미술가들의 단결과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職役奉公 : 일제강점기 국민 총동원 체제 아래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일을 잘하는 것이 바로 보국이며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라는 개념)’을 다하자는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일제는 1940년 10월에 조선총독부 산하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결성하고, 1941년 2월 22일 부민관 중강당에서 경성미술가협회를 발족하였다. 『매일신보』 1941년 2월 23일자 기사에 따르면 150여 명의 미술가가 결성식에 참여하였으며, “중대한 시국에 직면하여 우리 미술가들도 굳세게 총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회화⋅조각⋅공예⋅도안의 각 부문에 이르러 일치 협력한 다음 미술가의 본래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직역봉공을 하려고” 발기하였다. 다짐 형식으로 발표된 협회의 목적은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신체제 아래서 일억일심으로 직역봉공을 하여야 할 때, 미술가일동도 궐기하여 서로 단결을 굳게 하고 또한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을 다하자”였다. 하지만 1941년 3월 3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조선미술가협회’라 부르고 있어서 곧바로 지역조직이 전국 단위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회장은 총독부 학무국장, 고문은 총력연맹 문화부장, 이사장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이사는 매일신문사 학예부장 백철 등이었다. 회장 아래 평의원과 이사를 두고 각 분과를 다섯으로 나누었다. 일본인을 제외한 한국인으로는 제1부 동양화에 이영일(상임)⋅이상범⋅김은호, 제1부 서양화에 심형구(상임)⋅김인승⋅이종우⋅배운성⋅장발, 제3부 조각에는 김경승, 제4부 공예와 5부 도안에는 한국인이 없으며 평의원에 김인승, 이종우⋅배운성⋅장발, 이사에 심형구가 이름을 올렸다.
전시체제를 옹호하는 목적의 집단이자 관립기관의 부활로서 ‘이른바 내선일체의 관민합작의 결정판 같은 단체’로 규정된다.지역에서부터 전국 단위인 조선미술가협회로 확장되었으며, 미술인의 대대적인 조직으로서 친일미술을 주도하였으며, 미술인의 친일활동을 위해 조직된 최초의 대규모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