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몰학도 충혼탑 ( )

조각
작품
경상북도 포항시에 있는 학도의용군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에 건립한 기념탑.
정의
경상북도 포항시에 있는 학도의용군을 추모하기 위해 1957년에 건립한 기념탑.
구성 및 형식

둥글게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亞’자 형 평면으로 탑을 구축하였다. 세로로 길게 올려진 석축 전면에는 ‘전몰학도충혼탑’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판이 끼워져 있다. 그 아래 탑신 부분에는 청동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기린 혹은 천마로 추정되는 동물이 영기와 함께 부조되어 있다.

내용

6·25전쟁이 발발하자 71명의 학생이 학도병에 지원해 포항시의 포항여자중학교에서 후방지원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국군이 밀리던 8월 11일 북한 주력부대와의 전투에서 이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비정규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항 전선에서의 후퇴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학도병들이 산화한 것이었다. 전후 이들을 기리기 위해 학도호국단에서는 기념탑을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당시 서울대 교수이던 이선근이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6·25전쟁 때 관제의 학도호국단과 자발적 학생 조직인 학도의용군을 지휘하였다. 따라서 이 기념탑은 이선근이 주축이 되어 조성하면서 장식과 상징의 의미를 담은 부조는 작가 김종영에게 의뢰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김종영은 탑에 무늬를 새긴 청동판을 부착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탑의 하단부를 사천왕이나 팔부신중 등으로 장식하는 전통적 조성 기법에 비추어 보면 그리 색다른 방식은 아니다. 그는 세상에서 할 일을 마치고 비상하는 젊은이의 이미지에 걸맞은 도상으로서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천마를 채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1973년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천마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난 뒤 1975년에 탑은 재정비되었으므로 이때 수정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종영은 한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화상석에 대해서도 정통하였다. 따라서 한대의 화상석에 등장하는 천마도를 인지하고 있었고 그러한 도상적 기상을 전몰한 학도의용군의 정신으로 채택해 그 상징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기린도를 원형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탑의 형태가 원안이 아니므로 김종영이 어느 정도 제작에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탑신 전면에 부착된 청동 부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와 유사한 탑의 외면에 부착했을 것이며 평면과 높이에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을 추정해볼 수 있다. 대개의 탑이 사각의 기단임에 비해 이 탑은 복잡한 ‘亞’자 형 평면이며 화강암의 구축도 보다 분절적이며 규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조는 1956년부터 고안되었고 이듬해에 실현된 것임을 사진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제막식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사는 이 충혼탑의 건립 의의를 알려준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군인들이 귀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서 6·25의 공산 침략을 물리치고 우리 강토를 지켰으며 또 우방이 우리의 용감한 것을 보고 여러 방면으로 도와서 우리가 지금 남한만이라도 이만치 붙잡고 있는 것이니 우리 국군은 세계 반공 전선에서 제일 앞에 서서 싸우는 용감한 군대라는 영광된 명예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우국애족(憂國愛族)의 성심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학도들은 학도의 신분으로 자진해서 입대하여 공산군을 전멸시키고 나라를 지키는데 공산 침략이 위기를 죽음으로써 막아냈던 것이니 그 학도들의 거룩한 충성과 위훈은 영원히 우리 역사에 빛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청년 학생들이 자기의 목숨을 공헌해서 나라에 직책을 다한 것은 우리가 늘 잊지 않고 기념해야만 될 것이며 또 이때에 우리가 결심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를 속히 통일해 가지고 우리의 국권을 보호해야만 될 것이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보답은 우리가 뒤를 따라서 이 사람들의 공헌한 그 목적을 성공하도록 우리가 힘을 다해 가지고 싸워나가서 큰 성공을 이루어야만 되는 것이다.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고 많은 공훈을 세운 우리 학도병에 대한 성심으로 전국의 우리 학도 호국단이 다 합심해 가지고 격렬한 싸움으로 의용학도가 제일 많이 희생된 포항에 충혼탑을 세워서 그 애국 학도들의 공훈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열성을 치하하며 전몰한 영령의 거룩한 충성과 위훈을 다시 추모하는 바이다"(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3, 공보실, 1959) 현재의 탑은 김종영이 1957년에 세운 것을 다시 1975년 8월 11일에 고쳐 세운 것이다. 높이는 8.8m로 기단부와 탑신부가 갖추어져 있고 상륜부가 높이 솟은 형태로 탑신 전면에는 천마가 새겨진 청동 부조가, 후면에는 양각으로 비문이 새겨진 금속판이 부착되어 있다. 현재 탑에 부착된 부조판은 복제품이고, 1957년에 제작한 청동판은 포항의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김종영은 기념탑을 제작하면서 전통에서 찾아낸 도상을 현대의 기념비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당시 제작되던 기념비의 관행에 비추어 보면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기념탑이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시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근대문화유산 조각분야 목록화 조사보고』(문화재청, 2011)
「기록의 재생과 기억의 구조물, 한국전쟁기념물」(조은정, 『내일을 여는 역사』, 2010)
「우성 김종영의 1950년대 조각에 대한 연구」(조은정, 김종영미술관 발표요지문, 2010)
「1950·60년대 한국전쟁기념물」(김미정, 『한국근대미술사학』10, 2002)
집필자
조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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