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 신흥 리얼리즘회화 연구를 목표로 박진명, 이상춘, 정하보 등이 조형미술연구소를 창립하고 가을에는 전람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으며 사무소는 권농동 120번지 2층의 조형화실에 두었음을 알리고 있다. 박진명은 프로예맹 미술부 책임자였다. 프로예맹의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프로예맹 미술부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모색이 바로 조형미술연구소였다. 조형미술연구소의 주요 업무는 간판, 홍보전단을 제작하는 상업회사와 같은 역할이었다. 이론가 정하보가 주장한 것과 같이 미술가의 결성으로 미술운동으로 나아가는, 대중운동강화노선을 뚜렷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극단 신건설사 사건으로 프로예맹원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이상춘도 5월 15일에 검거되었다. 이 즈음에 미술동맹의 이엽(李葉)과 이갑기가 체포, 구속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미술전람회를 열었던 프로예맹 수원지부도 폐쇄되었다. 이상춘이 석방된 것은 1935년 12월이었으므로 실제적으로 연구소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