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실파는 1947년에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이 결성해 195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던 화가 동인단체이다. 순수를 표방한 미술 집단으로 장욱진·백영수·이중섭 등 초기 모더니스트들로 구성되었다. 1948년, 1949년, 1953년 3회의 전시를 열었다. 신사실파는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한 전통과 민족을 혼합한 새로운 조형 의식을 추구했다. 참여 작가 개개인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광복 이후 이념에 의해 화단이 사분오열되고 있을 때 ‘신사실’은 이른바 조형예술에서의 순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48년 제1회전으로 실체를 드러낸 신사실파는 순수를 표방한 미술 집단으로 파악되는데, 김환기 · 유영국 · 이규상 · 장욱진 · 백영수 · 이중섭 등 초기 모더니스트들로 구성되었다. 일본 유학파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참여자가 소수라는 점, 참여작가들의 작품세계가 독자적이며 이미 화단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한 인물들의 모임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1953년의 3회전 이후 더이상의 전시회를 개최하지 않았기 때문에 5년 동안 존재했던 한시적인 단체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신사실파 동인’이라는 명칭이 1956년 김환기 도불전의 주최자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10여 년 간은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사실파는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한 전통과 민족을 혼합한 새로운 조형의식을 추구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는데, 참여작가 개개인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947년 김환기는 유영국 · 장욱진 등과 접촉하며 동인 결성을 기획하였는데, 1948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김환기 · 유영국 · 이규상이 참여한 1회전을 화신화랑에서 열었다. 1949년 11월 23일부터 12월 3일까지 동화화랑에서 있었던 2회전에는 김환기 · 유영국 · 이규상 · 장욱진이 참여하였고, 1953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국립박물관에서 있었던 3회전에는 김환기 · 유영국 · 장욱진 · 백영수 · 이중섭이 참여하였다.
이 3회전을 끝으로 더 이상 전시는 없었으며, 1956년 중반에 김환기의 프랑스 유학과 이중섭의 사망 등으로 이 단체는 실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1965년에 이구열은 조형미술의 새로운 각성이라고 평가했으며, 1970년대 김환기의 업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특별히 모여 전시를 보여준 이 단체에 대한 관심은 1978년 원화랑에서의 ‘신사실파 회고전’ 이후에도 ‘신사실파 60년전’ 등 지속적인 회고전 형식을 통해 기억되고 있다.
유영국의 전언에 따르면 “신사실파란 이름은 김환기씨가 붙인 것으로 추상을 하더라도 모든 형태는 사실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이원화, 「한국의 신사실파 그룹」, 『홍익』13호, 1971). 이념의 공간에서 사실이란 외형의 형식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사실이란 추상만이 아니었음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고 실험적으로 전통을 주제로 삼거나 구성 자체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 등 다채로운 출품작의 성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들이 주장한 신사실이란 이념에 의해 규정된 사실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회원의 수도 적었지만, 참여 작가 면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당시 미술계에서 위상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전시 때마다 작가 구성에 변화를 주었고 작품의 방향성도 다르게 하였다. 하나의 조형이념이나 운동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추상을 기반으로 해 김환기가 나아간 자연과 민족의 결합, 유영국이 시도한 자연과 추상의 결합, 이규상의 문인적 추상, 장욱진의 탈속과 백영수의 자연적 평온함 추구 등은 한국화단의 서정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해방공간에서 발아해 전쟁을 거치며 꽃피운 미술 단체로서 당시 사회현상을 반영한 자연과 전통 그리고 탈속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김환기 · 유영국 · 이규상이 1948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화신화랑에서 ‘제1회 신사실파전’을 가졌다. 출품작은 김환기가 「꽃가게」 · 「여름」 · 「실과장수」 · 「가을」 · 「산」 · 「초봄」 · 「국화절」 · 「달밤」 · 「달과 나무」 · 「못가」의 10점, 유영국은 ‘회화(繪畵)’란 제목의 작품 10점, 이규상은 ‘작품(作品)’이란 제목으로 10점을 출품하였다.
제2회전은 ‘신사실파 미술전’으로 1949년 11월 23일부터 12월 3일까지 동화백화점의 동화화랑에서 열렸고 참여자는 김환기 · 유영국 · 이규상 이외에 장욱진이 있었다. 김환기는 「무제A」 · 「무제B」 · 「무제C」 · 「수림(樹林)」 · 「난초」 · 「돌」의 6점, 유영국은 「직선있는 구도A」 · 「직선있는 구도B」 · 「직선있는 구도C」 · 「직선있는 구도D」 · 「회화A」 · 「회화B」 · 「회화C」 · 「회화D」 · 「회화E」 · 「회화F」의 10점, 이규상은 「콤포지션A」 · 「콤포지션B」 · 「콤포지션C」 · 「콤포지션D」 · 「콤포지션E」의 5점, 장욱진은 「아(兒)」 · 「까치」 · 「독」 · 「마을」 · 「몽(夢)」 · 「방(房)」 · 「마을」 · 「원두막」 · 「점경(點景)」 · 「수하(樹下)」 · 「조춘(早春)」 · 「안(眼)」 · 「동리(洞里)」의 13점을 출품하였다.
피난지 부산의 국립박물관 화랑에서 1953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가졌던 제3회전에는 김환기 · 유영국 · 장욱진 · 백영수 · 이중섭이 참여하였다. 2회전까지 참여하였던 이규상이 빠지고 부산에 피난와 있던 백영수와 이중섭이 함께했다. 국립박물관에서 현대미술품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국립박물관의 최순우씨의 도움이라고 이경성은 밝혔다. 이때 김환기는 「봄」 · 「불면(不眠)」 · 「푸른 풍경A」 · 「푸른 풍경B」 · 「하꼬방」 · 「정물」 · 「화차(華車)」 · 「항아리와 태양」의 8점, 유영국은 「산맥(山脈)」 · 「나무」 · 「해변에서A」 · 「해변에서B」의 4점, 장욱진은 「동(童)」 · 「언덕」 · 「소품(小品)」 · 「작품」 · 「파랑새와 동(童)」의 5점, 백영수는 「전원(田園)」 · 「여름」 · 「태양의 하루」 · 「영리한 까치」 · 「바닷가」 · 「장에 가는 길」 · 「실내」 · 「아카시아 그늘」의 8점, 이중섭은 같은 제목의 「굴뚝」 2점을 출품하였다.
이후 ‘신사실파전’이란 명칭으로 전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1956년의 김환기 도불전시를 신사실파 동인의 이름으로 주최하는 것 등으로 보아 지속적인 전시의지를 지닌 단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단체의 중심에 있던 김환기의 프랑스 유학과 이중섭의 사망으로 전시는 지속하지 못했고 단체 또한 명맥이 단절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른바 조형에서의 순수를 표방한 동인들이다. 선언서 등을 남기지는 않았으며 단지 3회의 전시에 머물렀지만 ‘신사실’이라는 담론을 생성했고, 비중 있는 화가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광복 이후 이념에 의해 화단이 사분오열되고 있을 때 이들이 주창한 ‘신사실’은 이른바 조형예술에서의 순수를 표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