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만을 위한 미술단체로서 ‘민중운동의 단계에 발맞춘 민중예술의 고조’를 천명하였고 경성, 도쿄, 상하이 등 지부를 설립하였으나 별반 활동이 없다가 주요 활동가인 김복진의 검거로 와해되었다.
설립취지는 “조선의 화가, 조각가, 공예미술가들을 망라하여 조선인만의 작품전람을 계획하자”는 것이었으며 설립목적은 “조선을 중심으로 민중운동의 계단에 관련한 민중예술을 고조하자”는 것이었다.
1927년 8월 27일 미술가 23명이 출석한 가운데 창광회를 구성하기로 발기하고 선거로 김은호, 안석주, 김창섭, 이승만, 유경목을 규칙기초위원으로 선출하였다. 8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 돈의동의 열빈루에서 창립회를 가졌다. 간사로 김복진, 김은호, 김창섭, 임학선, 신용우를 선임하였고 “1. 우리는 장래 조선인 사회에 예술창조를 노력함 2. 우리는 건전한 예술로써 조선인 사회의 생활 향상을 지도함”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사업으로 전람회를 개최하고 연구소를 설치하며 잡지를 간행하는 등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1928년 3월 18일 종로 태서관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앞으로 진행할 방침을 “1. 연구소 설치의 건 1. 전람회 개최의 건(가을로 연기) 1. 지부설치의 건 1. 임원개선 간사 경성본부 김창섭, 김주경, 이승만, 유형목, 도쿄지부 김응진, 상하이지부 이창현, 연구소 박상진, 이제창”으로 결의하였다. 이때 연구소 설치건이 구체적인 안으로 결정되어 통과되었다. 이 연구소는 회원 뿐만 아니라 일반을 다수 수용하고 발전을 위하여 강사 이외에 상무위원을 두어 책임지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후 별다른 활동을 확인할 수 없으며, 김복진이 공산당 활동으로 투옥되자, 1928년 8월 해체되었다.
연구소를 설치하고 전람회를 열며 잡지를 발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경성본부, 도쿄지부, 상하이지부 등을 둠으로써 미술인의 대단위 조직을 구성하려 하는 시도를 파악할 수 있다. ‘민중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며 구성원이 프로예술동맹 소속원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프로예맹의 외부조직으로 파악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