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전에 조각가로서의 기틀을 닦은백문기(白文基, 19272018)는 한국 근대조각의 1세대이며 윤승욱(尹承旭, 1914?)에게 직접 사사받은 서울미대 조소과 1회 졸업생이라는 위치에 있다.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인체로서, 초기인 1940년대는 당시의 관학파적인 김경승이나 윤승욱의 영향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사실주의적 작품이 주를 이룬다. 1941년작 「K신부상」은 이상적인 상념의 인간상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K신부상」은 프랑스인 ‘안토니오 공베르(Antonio Gombert, 한국이름 공안국, 1875~1950) 신부’의 초상조각이다. 휘문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백문기는 장래 프랑스로 유학갈 요량으로 『조선말사전』을 편찬할 정도로 한국어가 유창한 프랑스인 공베르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했다. 공베르 신부는 기꺼이 프랑스어 교습을 해주었으나 백문기는 돈이 없던 지라 그에 대한 답례로 흉상을 제작하였다. 가슴 아래까지 오는 실물 비율의 흉상은 진흙으로 만든 다음 석고를 뜬 것이다.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버린 석고를 다시 빻아 태워 만든 석고로 캐스팅하여 흰 물감을 칠하여 공베르 신부에게 드렸지만 그는 주교님도 가지지 않은 흉상을 가질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작가가 소장하게 되었는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작가는 장독 속에 흉상을 넣어 마당에 묻어 두고 피난을 갔다. 9.28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오자 마당에서 파내어 가지고 있다가 다시 1.4후퇴 때 공군장교였던 작가는 여의도로 가져가 군용기에 실어 대구로 작품을 옮겨 오늘에 이른다. 근대기에 제작된 많은 작품들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하지만 작가의 지극한 보존 덕에 사실적인 방식의 근대 초상조각을 오늘까지 볼 수 있다.
그는 대학 입학 이후 「L부인상」과 「나부상」에서 고전적 희랍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1950년대에 후반 들어서는 「인상」(1958)이나 「모자상」(1959)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표현주의적인 양식을 추구하여 1960년대 초반까지 형태의 변형과 양감의 최대화를 시도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는 다시 사실적인 초상조각을 추구하며 기념조각에 힘쓰지만 이후 계속되는 「소녀상」시리즈를 통하여 괴체의 변용을 시도하였다.
백문기는 초기에는 목조와 브론즈를 함께 사용하여 작업하였으며 후기에는 주로 브론즈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양과 비례의 표현에 치중하였고 다양한 변모를 시도하며 초상조각을 제작하였던 작가이다. 그가 이룩한 정확한 묘사와 표현은 한국 구상조각의 한 전형을 이룬다. 이러한 작가의 행보에서 「K신부상」은 사실주의에서 출발한 근대기 조각의 전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광복 이전에 제작된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석고로 제작된 초상조각은 그 유존례가 더욱 희귀하다. 좋지 않은 석고로 작품을 제작한 방식과 작품의 재현대상이 분명한 점 등은 매우 귀중한 사적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