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뛰엘은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연합하여 결성한 미술 단체이다. 1961년 경복궁미술관에서 박서보, 윤명로, 김창열, 정영렬, 정상화, 김봉태 등이 연합전을 가진 뒤 결성했다. 1962년 3월 1회전, 1964년 4월 2회전이 열렸다. 전시는 2회전으로 막을 내렸다. 젊은 작가들의 전략적인 연합으로 홍대와 서울대를 떠난 이념적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협회의 명칭에서도 실천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념적 지향성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그러나 악뛰엘은 내부의 힘을 급격히 상실하면서 점차 소그룹 운동으로 전이되어 갔다.
1961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경복궁미술관에서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연합전을 가진 뒤, 두 단체는 통합하여 악뛰엘을 결성하였다. 전상수, 김용선, 김창열, 박서보, 이명의, 이양노, 장성순, 전상수, 정상화, 조동훈, 조용익, 하인두 등이 중심인 현대미술가협회는 서울대 출신으로 구성된 김기동, 김대우, 김봉태, 김응찬, 김종학, 박재곤, 손친성, 송대현, 유영렬, 윤명로, 이주영, 최관도 등의 60년미술가협회보다 윗세대였다. 전위적인 성격의 두 단체가 통합함으로써 앵포르멜은 당대 공통의 회화이념임을 천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1962년 3월 창립하여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1회전을 가졌다. 창립전에 실린 선언문은 “해진 존엄들, 여기 도열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 속에 부둥켜안고 홍조한다. 모두들 그렇게도 현명한데 우리는 왜 이처럼 전신이 간지러운가. 살점 깎으며 명암을 치달아도 돌아오는 마당엔 언제나 빈손이다.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광기다. 결코 새롭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이 상태를 수확으로 자위하는 까닭은 그것이 이른바 새로운 가치를 사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리이기 때문이다.”이다.
1963년에는 회원전이 열리지 않았는데, 대신 국제전 참가를 둘러싸고 잡음의 중심에 이들이 있었다. 대한미술협회(약칭 미협) 서양화분과의 11명 분과위원들 가운데 4인이 악뛰엘 소속의 30대의 젊은 화가였다. 이들은 미협 안에서 강력한 발원권을 행사하고 공보부와 예총에서 실시하는 ‘신인예술상 콩쿠르’ 심사에서도 실권을 행사하였다고 비판을 받았다.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파리 비엔날레를 준비해야 하는 미협에서, 35세 미만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파리비엔날레에 대해서만 의욕적으로 준비를 한 것이었다. 선정된 작가 4인 박서보, 윤명로, 김봉태, 최기원 중 악뛰엘 소속의 작가 3인이 선정되었고, 이들을 심사한 4인의 심사위원도 전 해에 파리비엔날레 출품자였던 김창열, 장성순, 정창섭, 조용익이었다며 “악뛰엘 판”이라는 비난에 휩쓸렸다.
1964년 4월 4일부터 13일까지 경복궁미술관에서의 2회 악뛰엘전에는 김대우, 김봉태, 김종학, 김응찬, 김용선, 나병재, 문미애, 민병영, 박서보, 석란희, 손찬성, 원대정, 유영돈, 윤명로, 이양노, 이춘기, 박상진, 장성순, 전상수, 정상화, 정영렬, 정창섭, 조용익, 하인두가 출품하였다. 현대의 전위미술을 표방한 20~30대 작가들로 이루어진 악뛰엘의 전시는 2회전으로 막을 내렸다.
현대미술가협회, 60년미술가협회 등 단체명을 사용하던 이들이 전위라는 이름 아래 결집하였다. 젊은 작가들의 전략적인 연합이었으며, 홍대와 서울대를 떠난 이념적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협회’라는 단체성에서부터 악뛰엘이라는 실천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념적 지향성이 강하게 표출되었지만, 소그룹 운동으로 전이되어갔다. 또한 화단을 장악한 기존 세력에 반발한 전위의 운동이 5.16 이후 기존의 가치에 대한 도전을 장려받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라는 내부의 힘을 급격히 상실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