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화협회는 순수예술로서의 판화의 발전과 대중적 보급을 위해 결성된 미술 단체이다. 1958년 제5회 국제현대색채석판화 비엔날레전에서 수상하고 첫 석판화 개인전을 열었던 이항성이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1958년 창립전을 가진 이래 1968년까지 협회전을 개최하였다. 다양한 양식과 표현기법을 수용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62년 이후부터 활동이 위축되어 창립회원 대부분이 도중에 협회를 이탈하였고 1975년까지 회원들의 부침을 거치면서 지속되었다. 한국판화협회는 판화에 대한 인식과 가능성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판화계의 활성화 및 표현매체로서 판화개념의 대중화,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매년 협회전과 공모전을 통해 한국현대판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58년 미국 신시네티 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현대색채석판화 비엔날레전에서 수상하고 첫 석판화 개인전을 열었던 이항성(李恒星)이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창립회원은 유강렬(劉康烈), 최영림(崔榮林), 이상욱(李相昱), 박성삼(朴星三), 박수근(朴壽根), 최덕휴(崔德休), 전상범(田相範), 임직순(任直淳), 장리석(張利錫), 변종하(卞鍾下), 김정자(金靜子), 차혁, 이규호 등이고 1958년 3월 18∼24일중앙공보관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한국판화협회는 다양한 양식과 표현기법을 수용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으나 1962년 이후부터 활동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창립회원 대부분이 도중에 협회를 이탈하였고 1975년까지 회원들의 부침을 거치면서 지속되었다.
1958년 창립전을 가진 이래 1968년까지 협회전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창립전을 제외하고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연례전은 2회전(1959년 2월 11일∼14일 중앙공보관화랑), 3회전(1960년 2월 15일∼21일 중앙공보관화랑), 4회전(1960년 8월 22일∼31일 중앙공보관화랑), 5회전(1960년 후반∼1961년 전반 추정), 6회전(1961년 4월 19일∼25일 동화백화점화랑), 7회전(1962년 6월 4일∼10일 중앙공보관화랑) 뿐이다.
협회전 개최 외에 새로운 표현매체인 판화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62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서 판화부가 신설되는 데 일조를 하였으며 국전에도 판화부를 신설하기 위해 1964년 제13회 국전을 앞 둔 상황에서 “모든 국제적인 전시회는 판화부를 중시하여 회화, 판화, 조각의 순서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판화계도 크게 성장했다. 현대작가초대전, 신인예술전 등에서 그 수준을 보였다. 그리고 국제적 활약의 실적도 갖고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오는 국전에는 판화부를 독립시켜 줄 것을 건의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문화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한국판화협회의 이러한 노력은 1968년, 1969년, 1971년에도 이어졌으나 아쉽게도 그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전에 판화부가 시설된 것은 1986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1964년부터는 판화의 저변확대와 신인발굴의 기치를 걸고 신인공모전을 개최하였다. 1964년 10월 4일∼10일에 수도화랑에서 처음 개최되어 1975년까지 이어진 이 신인공모전을 통해 김진석,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등과 같은 차세대 판화가가 배출되었다. 또한 국제교류에도 힘써 국제판화협회와 함께 1964년 6월 필리핀에서 한국판화전을 개최함으로써 국제무대에 한국판화를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1969년 초등학교 어린이 판화공모전을 개최하여 어린 꿈나무들을 키우려고 시도하는 등 판화의 발전과 보급에 힘썼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판화협회가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자 일군의 젊은 미술가들이 협회를 탈퇴한 후 1968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창립하였다. 13인의 창립 발기인은 강환섭(康煥燮), 김민자(金敏子), 김상유(金相遊), 김정자, 김종학(金宗學), 김훈(金薰), 배륭(裵隆), 서승원(徐承元), 유강렬, 윤명로(尹明老), 이상욱, 전성우(全晟雨), 최영림(崔榮林)이었다. 핵심회원이 대거 탈퇴하여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결성하자 이항성이 이끌고 있던 한국판화협회는 크게 위축되었고,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시회를 기획하는 등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였다. 1969년에 이항성이 기획한 한국 현대판화 10년전이 대표적 예이다. 화랑이 아닌 창일다방, 신성다방이라는 대중적 공간에서 열린 이 전시회는 초기의 판화계를 되돌아보는 회고적 성격의 전시회였고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구성원들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젊은 작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한국판화협회는 그 주도권을 내주었다. 이항성은 판화협회가 둘로 분리된 이후에도 파리에 체류하면서 국제적 활동을 계속하였고, 홀로 한국판화협회를 이끌며 고군분투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고판화 소장가로서도 유명하며 우리 판화의 전통을 찾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판화에 대한 인식과 가능성을 대중들에게 알려 한국현대판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