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파 ()

노점/박내현
노점/박내현
회화
개념
20세기 초 서구미술의 전면적 혁신을 가져온 미술운동. 큐비즘 · 입체주의.
이칭
이칭
큐비즘, 입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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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입체파는 20세기 초 서구미술의 전면적 혁신을 가져온 미술운동으로 큐비즘·입체주의라고도 한다. 1920년대 초 한국미술계에 이 용어가 소개되었다. 일본에서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1950년대에 함대정, 한묵, 변영원, 박영선, 박래현 등의 작품에서 입체파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부터 활약했던 중진급 화가들이었다. 한국의 입체파 미술은 사실주의에서 추상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대와 신세대 교체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의
20세기 초 서구미술의 전면적 혁신을 가져온 미술운동. 큐비즘 · 입체주의.
연원 및 변천

입체파(Cubism)라는 용어의 기원은 1908년 11월 다니엘 칸바일러(Daniel Kahnweiler)의 화랑에서 열린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레스타크(L'Estaque) 풍경화 전시에 대한 리뷰에서 루이 복셀르(Louis Vauxcelles)가 “작은 입방체들(little cubes)”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입체파는 색채와 질감을 제한하고 대상을 단면으로 분해한 분석적 입체파에서 콜라주라는 새로운 기법이 구사된 종합적 입체파에로의 과정을 거치며 전개되었다. 입체파는 표현주의ㆍ미래주의ㆍ다다 등 20세기 전반의 미술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술사학자들은 대체로 입체주의가 서양미술에 전면적 혁신을 가져왔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예컨대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은 그것이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의 발견에 버금갈 정도로 혁명적”이라고 하였고, 마크 앤들리프(Mark Antliff)와 패트리샤 라이튼(Patricia Leighten)은 입체주의가 “단지 그 후의 회화ㆍ 조각사진만이 아니라 건축, 그리고 가구의복ㆍ일상용품에 이르는 모든 것의 디자인까지 변모시킨 조형혁명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내용

입체파라는 용어가 한국미술계에 소개된 것은 1920년대 초이다. 1922년에 철학자 박종홍『개벽』 4월호에 실린 「조선미술의 사적 고찰」이라는 글에서 “신미술의 새로운 운동으로 인상파가 일어나고 입체파가 탄생하며 미래파의 절규하는 바는 동양 미술을 능가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입체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삼천리』 1932년 3월호에 실린 「파리의 모델과 화가 생활」이라는 글에서 나혜석(羅蕙錫)은 입체파에 대해 “입체파의 화면에는 색채의 교차, 운동감, 구성이 가득했다. 입체파의 대표자는 피카소와 브라크이다. 입체파는 야수파가 직감을 중시한 결과 너무 단순화하여 지식을 부정하므로 이에 반하여 모든 지식을 토대로 하여 미술을 건설하자는 것이다”라고 소개함으로써 피상적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입체파에 대한 한국 미술계의 반응이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1932년에 화가 김주경(金周經)은 「화단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에서 입체파에서도 순수한 피카소적인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것은 입체파가 조선의 민족적 입장이나 민족성에 맞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1939년에 오지호(吳之湖)도 자연의 형태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회화가 입체파 등장 이후 혼란을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피카소는 예술적 가치를 갖기보다 세상을 우롱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반면에 김환기(金煥基)는 “현대 전위 회화의 그 주류는 직선, 곡선, 면, 입체 따위의 형태를 갖춘 것이며 입체파야말로 순수 회화 예술을 추구한 것인데 지금의 모든 전위 회화는 입체파를 통과한 회화 정신이 있으므로 근대예술을 현대 예술로 계승한 것이다”라고 옹호하였다.

김환기를 비롯한 유영국(劉永國), 이규상(李揆祥) 등은 일본에서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입체파에서 파생된 기하학적 추상작품을 제작하여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입체파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는 1950년대였다. 1950년대 전반에는피카소ㆍ브라크ㆍ몬드리안ㆍ미래주의 등 세잔 이후 서구의 현대미술에 대한 소개가 문예잡지를 통해 많이 소개되었다. 대부분 1950년대에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는 일제강점기부터 활약했던 중진급 화가들이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함대정(咸大正)의 「소」(1956)는 대상을 날카로운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하고 대상과 공간을 통합하며 마치 조각과 같은 물리적 존재를 느끼게 하여 브라크가 레스타크에서 작업한 1908년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한묵(韓默)의 「가족」(1957)도 인물과 배경이 단순한 기하학적 면으로 분해되고 있어 브라크의 1930년대 작품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 밖에 변영원(邊永園)의 「반공여혼」(1952)은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의 영향을 보여주며, 박영선(朴泳善)의 「파리의 곡예사」(1957)는 피카소의 「곡예사의 가족」(1905)이나 들로네의 「파리」(1910∼12)를 결합시킨 느낌이다. 1950년대에는 동양화가들 사이에도 입체파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 박래현(朴崍賢)의 「노점」(1956)은 인물과 주변의 배경을 기하학적으로 분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화가들의 입체파 시도는 매우 피상적이었다. 이들은 입체파를 대상을 작은 기하학적 단면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 한국 작가들은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형태가 보이는 종합적 입체주의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입체파와 차이를 보인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앵포르멜 미술이나 추상표현주의가 소개되면서 입체파에 대한 관심은 식게 된다.

의의와 평가

입체파는 미술작품이 실재의 거울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의미를 갖는 미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또한 다시점과 경험의 지속을 통합함으로써 근대 도시의 변화된 삶의 조건과 그러한 공간 속의 역동적 경험을 드러낸 미술이었다. 한국의 입체파 미술은 외부의 세계를 묘사하는 사실주의에서 추상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대와 신세대 교체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참고문헌

『20세기의 한국미술2: 변화와 도전의 시기』(김영나, 예경, 2010)
The Cubist Epoch (Cooper, Douglas. New York and London: Phaidon, 1970)
Cubism: A History and an Analysis, 1907–1914 (Golding, John. Cambridge, Massachusett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5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정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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