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높이 64.5㎝, 무릎 폭 32㎝. 보살상과 대좌는 따로 주조되었다.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의 바닥면에 음각되어 있는 조성기에 의하면, 1790년에 관허당 설훈(觀虛堂 雪訓)과 용봉당 경환(龍峰堂 敬還)이 지장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이 지장보살좌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설훈과 경환은 현등사의 신중도(神衆圖)를 그렸던 승려이다. 설훈은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에서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지장암은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 『범우고(梵宇攷)』, 『전등 · 봉선본말사지(傳燈 · 奉先本末寺誌)』 「운악산현등사사적(雲岳山懸燈寺事蹟)」 등의 기록을 통하여 1823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71년의 『가평군지(加平郡誌)』에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청동지장보살좌상은 19세기 중반에 지금의 현등사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높다.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두건(頭巾)을 쓴 지장보살로서 꽃문양의 귀걸이만 하였을 뿐, 몸에는 어떤 장엄도 하지 않고 법의만 착용한 모습이다. 지장보살상은 통견(通肩)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가부좌를 하였다. 장방형에 가까운 머리와 약간 긴 상체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길어 보인다. 보살상은 머리와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어 사색하는 모습이다.
청동지장보살좌상은 두건을 쓴 다음 머리 뒤에서 끈으로 묶었는데, 끈의 양 끝자락이 펼쳐져 어깨 뒤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마 위의 두건은 접혀진 곳이라곤 전혀 없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두건의 양쪽 자락은 어깨를 덮고 옆으로 흘러내린다.
상호(相好)는 이마의 가로 폭이 넓고 턱이 짧은 방형으로서 완만한 원을 그리는 눈썹과 그 사이에 동그랗게 표현된 백호(白毫), 적당히 뜬 눈, 삼각형의 코, 넓은 인중, 꾹 다문 입, 큰 귀를 갖추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라고 생각되는 두 줄의 선이 새겨져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쪽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쪽 무릎 위에 두었는데, 손에 지장보살의 지물(持物)인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왼손은 손등을 위로 한 채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은 통통한 편이나 손가락이 길고, 손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은 대의(大衣)와 승각기(僧脚崎) 등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법의는 신체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표현되었다. 승각기 띠 위의 주름은 전혀 표현되지 않고 수평으로 밋밋하게 처리되었으며 띠 아래에는 살짝 나온 복부가 표현되었다. 법의 표현 방식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양쪽 어깨를 덮고 내려오는 두건과 오른쪽 어깨에서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법의 자락, 오른쪽 발 끝을 살짝 덮은 다음 왼쪽 무릎 위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이 지그재그식으로 큼직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좌는 복판(複瓣) 연화문으로 이루어진 앙련(仰蓮)의 상대와 복련(伏蓮)의 하대가 맞붙어 있는 모습으로, 앙련은 짧고 복련은 길다. 대좌는 다소 균형이 맞지 않고, 조각의 수준도 지장보살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전체적인 비례와 얼굴 표정, 두건 형식, 지그재그식 법의 표현 등을 통하여 18세기 말 불상의 특징을보여 준다.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각이 지지 않은 두건을 쓰고 양쪽 어깨와 오른쪽 팔뚝, 왼쪽 무릎 위를 덮고 있는 법의 자락이 지그재그식으로 처리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조선시대 보살상으로는 드물게 청동으로 주조되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밑바닥에 음각된 조상기를 통하여 1790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지장보살좌상은 기년명 보살상이자 청동으로 제작된 수준 높은 존상으로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기준작이다. 또한 조각승 설훈과 경환을 통하여 조선 후기에 조각승들이 조각과 회화를 가리지 않고 망라하여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