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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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오페라단
서울시립오페라단
현대음악
개념
음악을 중심으로 문학적, 연극적, 미술적 요소를 포함한 종합적 무대예술. 오페라.
이칭
이칭
오페라
목차
정의
음악을 중심으로 문학적, 연극적, 미술적 요소를 포함한 종합적 무대예술. 오페라.
내용

음의 영역에 맞게 각 역을 분담하여 연기를 하며, 독창·중창·합창 등으로 불린다. 관현악은 전체 음악의 반주와 개막 전의 서주곡, 막 사이의 간주곡으로 나뉘고, 무용과 노래를 부르지 않는 연기자가 추가되기도 하며, 각종 무대장치와 소품·의상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종합무대예술로 간주되고 있다.

서양음악에서 연극적인 음악은 고대 그리스 이래로 계속되어 왔으나, 본격 가극은 16세기 이탈리아 문예부흥 말기에 기원을 둔다. 즉 고대 그리스극을 모범으로 한 새로운 극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피렌체를 비롯하여 대부분 로마·나폴리·베네치아 등지에서 가극이 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극운동은 그 후 프랑스·독일 등 유럽 각국에 영향을 주어 여러 가지 가극의 양상을 낳게 하였다. 그 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현대를 거치며 여러 작곡가를 통하여 가극이 발전했다.

가극은 희극적인 내용과 비극적인 내용에 따라 종류를 구분하는데, 비극적인 내용의 가극을 정가극(正歌劇)이라고 하여 정통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 나라 가극의 효시는 1948년 베르디의 낭만적인 작품 「춘희(椿姬)」의 공연으로, 이인선(李寅善)의 국제오페라사에서 공연하였다.

1949년 한규동(韓圭東)을 중심으로 한불협회(韓佛協會)가 구노의 「파우스트」의 일부가 무대에 올렸고, 1950년 국제오페라사가 비제의 「카르멘」을 공연했다. 이후 여러 오페라단이 명멸하면서 몇 편씩의 가극을 공연하였다.

즉, 김학상(金學相)을 대표로 하는 서울오페라단, 한경진(韓景鎭)을 대표로 하는 프리마오페라단, 정동윤을 대표로 하는 한국오페라단과 서영모를 대표로 하는 고려오페라단, 그리고 강상복을 대표로 하는 대한오페라단 등이 국립오페라단이 조직되기 이전인 1961년 말까지 활약했던 오페라단들이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이점희를 대표로 하는 대구오페라단과 김창배를 대표로 하는 부산오페라단이 있었다. 1964년 국립오페라단이 설립되었고, 이후 1967년 말까지 오페라공연은 국립오페라단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이루어졌다.

1968년에는 김자경을 대표로 하는 김자경오페라단이 조직되어, 국립오페라단과 더불어 최근까지 오페라공연의 두 기둥이 되어왔다. 1970년 대한오페라단이 부활되어 활동하다가 해체되었다. 1975년에는 김봉임(金鳳任)에 의하여 서울오페라단이 창단되었으며, 「춘향전」을 가지고 1983년과 1984년에 미국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1983년 광주의 광주오페라단과 서울의 오페라상설무대가 조직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1985년 서울시립오페라단이 조직되었다. 한편, 각 대학의 오페라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대구의 계명대학교 음악대학, 이리의 원광대학교 음악과, 단국대학교 사범대학의 음악교육과, 성심여자대학 음악과의 오페라공연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국립오페라단과 김자경오페라단의 오페라공연이 주가 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이 공연한 오페라작품은 1984년 12월 말 현재 약 60여 편에 이르고 있고, 공연횟수는 약 4백여 회에 이른다. 이 중 우리 나라 작곡가의 창작오페라는 모두 12편 80여 회에 달한다.

외국 오페라단의 공연은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 음악계에 적지않은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즉, 1961년에 있었던 서울국제음악제에 참가했던 독일인 성악가와 한국인 성악가의 합동 공연을 시작으로 하여, 1977년의 독일 베를린오페라단, 1978년의 이탈리아 파르마오페라단과 1979년의 스칼라오페라단, 같은 해 영국 로열오페라단의 공연은 우리 나라 성악계는 물론, 음악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도 1967년과 1970년의 일본인 성악가와의 합동 공연, 1972년의 한독협회가 주최한 독일인 성악가와의 합동 공연 등도 기억할 만하다. 그러나 오페라공연의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창작오페라 공연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구태의연하게 공연 작품을 선정하는 탓에 대중적인 몇몇 작품만 지나치게 공연되는 등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 사람이 창작한 오페라의 효시는 1950년 발표된 현제명(玄濟明)의 「춘향전」이다. 이후 1951년 김대현(金大賢)의 「콩쥐팥쥐」, 1954년 현제명의 「왕자 호동」이 각각 발표되었다.

1962년 장일남(張一男)의 「왕자 호동」, 1966년 역시 장일남의 「춘향전」, 1970년 김달성(金達聲)의 「자명고(自鳴鼓)」, 1971년 장일남의 「원효대사」, 1972년 박재훈(朴在勳)의 「에스터(Esther)」, 1975년 홍연택(洪燕澤)의 「논개」, 1978년 김동진(金東振)의 「심청전」, 1983년 박재열(朴在烈)의 「초분(草墳)」과 「심청가」가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현제명의 「춘향전」 이래 1984년 12월 말 현재 모두 12편의 창작오페라가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은 현제명의 「춘향전」이다. 그러나 작품의 편수도 다른 어떤 서양음악 창작 분야보다 적을 뿐더러, 그 질도 아직 서양적인 수법을 모방하는 단계일 뿐, 아직은 한국적인 오페라의 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불과 40년도 못 되는 오페라공연 활동에서 여러 어려움을 이기고 4백여 회의 공연횟수를 기록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연활동을 통하여 오페라 인구의 저변확대와 새로운 신진 성악가들을 배출한 것은 높이 평가될만하다. 그러나 아직 전용 오페라극장이 없고, 또 전문으로 하는 성악가와 연출가도 거의 없다.

또한 오페라를 전문으로 하는 지휘자와 관현악단도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적지않은 문제점과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 외국작품이든 창작오페라이든 서양식 발성법에 우리 가사를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기는 가사 전달의 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국립오페라단과 서울시립오페라단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오페라단이 고정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연 때마다 즉흥적으로 출연진이 결정되어 몇몇 중진급 성악가들 중심의 오페라가 됨으로써, 각 오페라단의 특징 없는 오페라공연이 이루어지는 점도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다.

참고문헌

『한국서양음악백년사』(이유선, 음악춘추사, 1985)
집필자
이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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