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부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왕경에 설치되었던 특별 행정구역, 또는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995년(성종 14)
공포 시기
995년(성종 14)
시행 시기
고려시대
폐지 시기
고려 말
시행처
고려왕조
내용 요약

개성부는 고려시대 왕경(王京)에 설치되었던 특별 행정구역, 또는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이다. 995년(성종 14)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폐지되었고, 1062년(문종 16)에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두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도성 안을 관할하는 개성부를 다시 두었다.

정의
고려시대, 왕경에 설치되었던 특별 행정구역, 또는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
제정 목적

고려의 개성부(開城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왕경(王京) 지역에 설치된 특별 행정구역으로서 장관은 윤(尹)이었다. 다른 하나는 주12가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이다. 이 둘은 공존하지 않았고, 하나의 주1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성격이나 운영에서 차이가 있었다.

내용 및 변천사항

고려의 주13는, 919년(태조 2)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이를 개주(開州)라 부르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주에는 궁전과 주14을 세우고, 주15를 구분해 5부(部)로 나누었다.

987년(성종 6)에 5부 방리를 다시 정했으며, 995년 개성부로 바꾸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두어 적현(赤縣) 6현과 기현(畿縣) 7현을 관장하였다. 이 개성부는 별도의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현과 기현으로 구성된 상급 단위였으며 당나라의 경조부(京兆府)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018년(현종 9) 개성부를 없애면서 주16의 5부를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시키고 따로 경기(京畿)를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개성현령(開城縣令)과 장단현령(長湍縣令)이 각각 3현과 7현을 관할하면서 상서도성(尙書都省)에서 직접 관할을 받았다.

1062년(문종 16)에 개성현령을 주17로 승격시키고,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 관내에 있던 우봉군(牛峯郡)을 주3시켰다. 장단현령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주현군(州縣軍) 편성에서 개성부도(開城府道)를 두었는데, 그 정원은 보승(保勝)이 52인, 정용(精勇)이 240인, 일품군(一品軍)이 190인이었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한 뒤, 급전도감(給田都監) 및 5부를 개성부에 합쳐 도성 내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면서, 개성부의 행정상 지위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개성부는 지방 행정구역이었으나, 이제 도성 내의 5부까지 모두 관할하게 되면서 중앙 기관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에 주5도 확대되어 판부윤(判府尹: 주6 1인, 부윤(府尹: 주7 2인(1인은 겸임관), 소윤(小尹: 정4품) 3인(1인은 겸임관), 판관(判官: 정5품) 2인, 기실참군(記室參軍: 주8 2인을 두었다. 이 가운데 부윤 이하의 관리는 서울 주18을 맡되, 모두 선공시(繕工寺)의 사무를 겸임하였다. 이와 별도로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의 주변 지역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주9를 개정해 윤(尹)을 종2품, 소윤을 정4품, 판관을 정5품, 주10을 정7품, 주11을 정7품, 현승을 정8품으로 개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판부사(判府事)를 더 두었는데, 그 지위는 윤의 위이고, 품계는 윤과 같았다.

그 뒤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눌 때 개성현은 우도에 속하였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 왕경에 설치된 개성부는 특별 행정구역인 적도 있고,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이기도 했던 특수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이를 통해 왕경과 경기의 제도적 추이를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박용운, 『고려시대 개경 연구』(일지사, 1996)
김창현, 『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신서원, 2002)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의 황도 개경』(창작과비평사, 2002)
한국역사연구회, 『개경의 생활사』(휴머니스트, 2006)

논문

변태섭, 「고려시대 경기의 통치제」(『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80)
윤경진, 「고려 전기 경기의 편성과 운영」(『역사문화연구』 33,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9)
정학수, 『고려 전기 경기제 연구』(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末松保和, 「高麗開城府考」(『稻葉博士還曆記念滿鮮史論叢』, 稻葉博士還曆記念會, 1938)
주석
주1

어느 시점까지 변천하여 온 과정. 우리말샘

주3

옮겨 소속시킴. 우리말샘

주4

고려 초기에, 전시과의 시행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아. 토지 제도의 문란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한때 폐지되었다가 고종 44년(1257)에 부활되었으나, 공양왕 4년(1392)에 다시 폐지되었다. 우리말샘

주5

직무나 직위에 관한 제도. 우리말샘

주6

고려 후기에, 도성 안의 사무를 맡아보던 개성부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이품이다. 우리말샘

주7

조선 시대의 지방 관아인 부(府)의 우두머리. 종이품 문관의 외관직으로 영흥부와 평양부, 의주부, 전주부, 경주부의 다섯 곳에 두었다. 우리말샘

주8

고려 시대에, 기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벼슬. 공민왕 5년(1356)에 참군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9

여러 벼슬자리에 대하여 매기던 등급. 제일 높은 정일품에서 제일 낮은 종구품까지 18단계로 나뉘어 있다. 우리말샘

주10

고려 시대에, 개성부에 속한 정칠품 벼슬. 공민왕 5년(1356)에 기실참군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1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둔, 현(縣)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오품이며 신라 때에는 대소의 구별이 없이 각 현에 두었다가, 고려ㆍ조선 시대에는 큰 현에만 두었으며, 작은 현에는 감무 또는 현감을 두었다. 우리말샘

주12

고려 문종 때에 둔 개성부(開城府)의 벼슬. 우리말샘

주13

왕궁이 있는 도시. 우리말샘

주14

시장 거리의 가게. 우리말샘

주15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 우리말샘

주16

서울의 안. 우리말샘

주17

고려 문종 때에 둔 개성부(開城府)의 벼슬. 우리말샘

주18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인 안.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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