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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사(高麗國史)

고려시대사문헌

 조선전기 문신·학자 정도전·정총 등이 왕명을 받아 1395년에 편찬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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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전기 문신·학자 정도전·정총 등이 왕명을 받아 1395년에 편찬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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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총 37권의 편년체 사서이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이 건국된 뒤 3개월만인 1392년(태조 1) 10월 조준(趙浚)·정도전·정총·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이 왕명을 받아 1395년에 편찬하였다. 그러나 1414년(태종 14) 5월 고려 말기의 기사 가운데 태조에 대한 기록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개찬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서지적 사항 및 내용
현존하지 않으나 당시 정총이 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가 『동문선』에 남아 있고, 정도전이 이를 왕에게 바칠 때 쓴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과 태조가 정도전·정총을 포상하는 글이 『태조실록』에 실려 있어, 편찬체재 및 편찬에서 중시한 점, 편찬원칙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정도전과 정총이 쓴 사론이 『고려사절요』에 전하고 있어 그들의 사학사상을 알 수 있다.
「고려국사서」에 나타난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원종 이전의 사실로 참의(僭擬)한 것은 개서하였다. ② 조회나 제사는 상례적인 행사지만, 거르거나 왕이 직접 참여한 경우는 기록하였다. ③ 재상의 임명을 기록하였다.
④ 과거로 선비를 뽑은 것을 기록하였다. ⑤ 대간의 복합(伏閤)은 그 내용이 전하지 않아도 반드시 기록하였다. ⑥ 상국의 사신이 왕래한 사실은 반드시 기록하였다. ⑦ 재이와 홍수 및 가뭄을 기록하였다. ⑧ 왕의 사냥과 연회를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편찬원칙에서 찬자들의 유교적이며 사대적인 성향을 찾을 수 있고, 후대의 군주들에게 정치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책에 실렸던 사론은 『고려사절요』에 ‘사신왈(史臣曰)’로 인용되어 57편이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역대 왕에 대한 평가인 찬(贊)은 정도전의 『경제문감』에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많아 이 부분은 정도전이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7편의 사론 중에는 정도전과 함께 『고려국사』 편찬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총의 찬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사론에는 고려왕조를 비판하는 처지, 무신정권을 비판하는 문신중심적 처지, 불교를 배척하는 처지, 유교윤리와 사대외교를 옹호하는 처지를 취하고 있어, 조선 초기 성리학적 사대부들의 사상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군주의 어진 정치와 덕스러운 정치가 강조되었고, 재상과 대간의 직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왕도정치와 재상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
이 책의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고려실록』,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고려 말기 사관(史官)들이 써놓은 사초(史草) 등이었다. 그러나 『고려실록』은 충실하게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고려국사」는 내용이 소략하고 인물평가가 공평하지 못하며, 내용을 잘못 기술한 곳이 있고, 역사기술에 과거에 썼던 칭호를 개서한 점, 조선 건국을 사대부 중심으로 서술한 점 등이 문제가 되어, 1414년 개수되기 시작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되다가, 1451년(문종 1) 서술체재가 완전히 다른 『고려사』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책의 개편 이유를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臣權)의 갈등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하고도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정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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